[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5]

▲ 헨리크 고레츠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표지
(* 그림을 클릭하시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고레츠키(Henryk Gorecki, 1933~ )의 교향곡 3번은 ‘슬픔의 노래(The Symphony of Sorrowful Songs)’라고 불립니다. 고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한 진혼곡이지요.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악장의 소프라노 가사는 폴란드 성십자가 수도원의 애가(Lamentation)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택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너의 엄마에게 나누어 주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독백입니다.

제2악장은 폴란드 짜코파네(Zakopane) 게슈타포 본부의 지하실 벽에 낙서된 글귀에 곡을 붙였다지요. 헬레나 반다 블라추지아코브나라고 서명을 남긴 열여덟 살 소녀가 감옥 밖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어머니를 위해 남긴 글귀입니다. “울지 마세요. 엄마, 울지 마세요. 가장 순결하고 귀한 천상의 여왕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예요.”

이어지는 3악장은 폴란드 오폴레 지역의 민요입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돌아와 쉴 따뜻한 침대를 마련했건만 결국 아들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가련한 어머니가 울부짖습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물어보아도 내 아들 묻힌 곳을 알 수 없네. 불쌍한 내 아가, 차갑고 험한 도랑에 누워 있지는 않으려나. … 너 하느님의 작은 꽃들이여, 내 아들 묻힌 곳에 고운 꽃을 피워 주렴. 내 아가 행복하게 잠들 수 있도록.”

참 잔인하도록 슬픈 노래지요? 단장(斷腸), 즉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슬픔이란 이런 슬픔들을 일컫는 말일까요? 신학개론 시간에 욥기를 읽으면서 저는 학생들과 이 노래를 함께 듣곤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지요.

“이 어머니들과 딸이 울부짖을 때,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 계셨던 걸까? 무엇을 하고 계셨던 걸까? 하느님이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우시다면, 어떻게 아들의 처절한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어미를, 언제 죽을지 모를 게슈타포의 감옥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딸을, 아들의 시체조차 안아 보지 못한 불쌍한 늙은 어미를 두고 보고만 계셨던 걸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과 함께 욥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교양 필수로 신학 수업을 듣는 우리 학생들에게 욥기란 여러모로 생소한 책이지요. 성서 자체를 처음 읽어보는 학생들도 있지만,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녀 나름 성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학생들조차도 욥기는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보면, 본당에서도 욥기는 대체로 언급을 꺼리는 책인 듯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욥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욥기의 하느님은 평생 남에게 상처 준 일 없고, 누구보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며, 게다가 불쌍한 이웃을 돕는 데도 열심이었던 선하고 의로운 남자 욥을 가차 없이 내리치고 혹독한 고통을 겪게 하는 하느님입니다. “도대체 왜?” 하고 묻지만 아무도 하느님의 속마음을 모릅니다. 욥의 고통을 해석하고 싶어 했던 세 친구들은 집요하게 그 이유를 따지지요. “아마도 자네가 과거에 뭘 잘못했겠지. 하느님이 아무 이유 없이 자네를 벌하실 리 없어.” 그러나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혹독한 죗값을 치러야 할 정도로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 같지 않습니다.

책의 말미, 욥과 친구들의 길고 긴 논쟁 끝에 하느님이 응답을 하시는데, 그 응답이 또 기가 막힙니다. 하느님은 위로도 아니고 항변도 아니고 어느 누구 편들어 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당신의 위대함과 웅장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으십니다. “너희는 아무리 애써 봤자 나와 내가 지은 세상의 어마어마하게 큰 이치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딜 감히!”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하느님은 낯설고 거북하고 두렵습니다. 실은 젊은 세대들뿐만이 아니지요. 욥기의 하느님은 모든 신앙인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 <욥과 잘못된 위로자들> 세부, 장 푸케 작품

내가 잘못해서,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마음 한구석, 우리는 신앙이 어떤 방식이건 삶에 “이득”이 되길 바라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하느님은 부모님처럼 늘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선하고 의로운 이들에게 세상이 부러워할 복을 주시는, 일할 때나 공부할 때나 연애할 때나 우리 삶에 늘 개입하시며 깨알 같이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 척척 들어주시는 만능 자판기 같은 하느님이죠.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삶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가혹한 시련은 결코 선한 이와 악한 이를 구별하여 덮치지 않는다는 것을요. 세상은 오히려 자기 욕심 챙길 줄 모르고 살아온 착하고 여린 이들에게 더 가혹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흔히 이런 말들을 되뇌곤 하지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겠지. 믿음이 부족해서일 거야. 뉘우치고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야.” “지금은 힘들어도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하느님이 모른 척 하시지 않겠지.” “이 고통은 내게 주시는 연단(鍊鍛)이며 훈련일 뿐이야. 하느님은 결코 이기지 못할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아.” 혹은 “하느님은 천국에 내 자리를 마련하고 계실 거야. 나 죽어 하느님 곁에 가면 모든 고통을 하늘에서 다 갚아 주실 거야.”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착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불합리한 시련’ 사이의 이율배반을 이해해보기 위해 고안해 낸 이런 대응방식들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나 스스로의 고통을 이겨 보기 위해, 혹은 내 이웃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수없이 되뇌어 온 말들이죠.

그러나 솔직히, 아주 솔직히 털어놓아 봅시다. 위의 말들이 수긍이 되고 위로가 되던가요? 차마 두려워 입에서 꺼내 놓지는 못했지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가슴을 치는 와중에 속에서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는지요?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내 믿음을 키우려 주시는 연단이라면, 왜 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도대체 얼마나 큰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지금 내 행복을 다 빼앗아 가시며, 도대체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아픔을 씻어 주시려는 겁니까? 죽어서 누릴 행복 때문에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까?’

과거의 죄, 믿음의 깊이와 아무 관계 없을 지도 모르는 ‘불행’

<왜 선한 이들에게 불행한 일들이 닥치는가?>라는 책을 쓴 미국의 랍비 해롤드 쿠쉬너(Harold Kushner)는 조로증이란 유전병을 갖고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던 아들 아아론을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결국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쿠쉬너의 글들은 자신과 같이 “불합리”한 고통에 신음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띄우는 솔직하고 담백한 자전적 고백이지요.

아들을 잃은 부모이자 공동체의 식구들과 삶을 나누는 목회자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쿠쉬너는 말합니다. 아마도 하느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전능”하지 않으실지 모른다고요. 재해와 몹쓸 병과 불의의 사고들은 그저 자연 현상, 물리적 현상일 뿐, 하느님의 인격과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전쟁과 살인과 폭력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일 뿐, 일찍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하느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당신의 완벽한 계산 안에 두고, 우리가 올리는 기도의 횟수와 열심의 정도를 따지며 이쪽저쪽 저울질하여 세상의 일들을 통제하고 조율하지 않으신다고요.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겠네요. 하느님의 위대함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감히 우리의 기준대로 하느님의 능력을 가늠하거나 하느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요.

쿠쉬너의 말처럼, 인격과 자유의지가 없는 불행은 나에게, 또 착하디착한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언제든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은 우리가 저질렀을지 모를 과거의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우리 믿음의 깊이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면 의로운 이들이 늘 승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악인들보다 더 처절한 패배와 슬픔을 감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은 과연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저 손을 놓고 바라보고 계시는 걸까요? 믿는 이들이 바라고 의지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왜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도대체 하느님의 능력과 힘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쿠쉬너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 번도 선한 이들을 저버리시는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한 놀라운 기적을 언제나 예비하고 계시다고요. 다만 우리는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과, 그분의 힘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쿠쉬너가 말하는 하느님의 기적은 바다가 두 갈래로 갈리거나, 물 위를 걷거나,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거나 하는, 신문의 가십 란에 실릴만한 기적이 아닙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아 놀랍고 부러워할 만한 능력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어쩌면 느리고 조용하고 감지하기 힘들게 펼쳐집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기적,
언제나 우리 곁에서 일어날 기적

하느님의 기적은 인간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이죠. 인간이 곧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무력과 권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람 마음의 변화, 생명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서로 의지하며 생명을 바라게 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가혹하고 처절한 절망 속에서 문득 다시 일어날 뜨거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힘입니다. 세상이 다 회색으로 변하고 생기라고는 감지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며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면, 하느님이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신호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이들이 걷는 길은 외롭고 지난하고, 유난히 잘 안 풀립니다. 강정과 밀양과 대한문, 국정원 의혹, 그렇게 우리에게 놓인 싸움들이 오늘도 우리를 고단하게 합니다. 지치고 암울할 때 우리는 “기적”을 바라죠. 한 번에 싸움판이 뒤집어지는 기적은,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우리는 언제나 기적을 고백할 것입니다. 남의 일에는 관심 쓸 여유가 없던 바쁜 직장인이 어느 날 문득 시청 앞을 지나다 마음에 이끌려 시국기도회에 동참하여 “잘은 모르지만 나도 그저 함께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밀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구럼비 바위가 다 깨어져 나가고, 쌍용차 노동자들이 절망으로 쓰러질 때 그 자리를 지키며 함께 울고 함께 어깨 거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의 기적을 고백합니다.

그들의 눈물과 싸움이 곧 하느님의 눈물이며, 하느님의 싸움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통해 일하시며,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당신께 돌아올 때를 간절히 염원하시며, 당신의 모든 능력을 오로지 기다리는 데만 사용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하고 의로운 길, 생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적이며 그런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조민아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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