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 100

“14 그들이 군중에게 돌아오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15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아이는 가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17 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여러분과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오시오“ 하시고 18 마귀에게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19 사람들이 없을 때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0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하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마태오 17,14-20)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9,14-29를 마태오는 크게 줄이고 고쳤다. 같은 내용의 단락이 루가복음에도 나오지만 마태오의 보도와 조금 다르다. 16절에 해당하는 마르코 보도를 6절 길이로 크게 줄인 마태오는 치유 사건에 대한 표현을 줄이고 제자들과 나눈 대화 장면을 부각시켰다. 마태오는 전체적으로 이적사건에 대한 보도를 축소하고 이적사건에 대한 대화를 강조하는 편이다. 어린이 몽유병환자에 대한 치유한 후 예수는 제자들의 작은 믿음을 나무란다.

성서 각 단락에는 원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그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붙여지는 제목에서 해설자의 실력이 드러나기도 한다. 오늘 단락에 붙은 다양한 제목을 보자. ‘마귀에게 사로잡힌 아이’(개신교 가톨릭의 공동번역),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개신교의 개역개정), ‘간질병 들린 소년의 치유와 제자들의 가르침’(슈바이처), ‘산을 옮기는 믿음의 힘’(루즈), ‘제자들의 작은 믿음이 어린이 몽유병환자의 치유를 미루다.’(그닐카) 해설자마다 그 강조점이 다르지만 누구의 실력이 가장 저급한지 금방 나타났다. 부실하게 변역된 성서를 글자 그대로 외우게 시키는 개신교나 베껴쓰기를 시키는 가톨릭이나 그 하는 행태가 참 안타깝다. 엉터리로 가르쳐 놓고 어찌 학생을 탓하랴. 부실한 성서교육을 하고서 신자들을 혼내는 장면이 오늘도 반복된다. 그 뻔뻔스러움이 참 놀랍다.

14절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환자 아버지의 기도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15절에서 어린 환자가 위중한 상태임이 드러난다. 몽유병 또는 간질병은 당시 흔한 병이었다. 에피레피아(epilepia, 쓰러짐)는 병이 귀신에게 비롯된다는 민간신앙에서 나온 단어다. 마태오는 그것을 몽유병이라고 하는데 후대 문헌에 루나티쿠스(lunaticus)라는 단어가 보인다. 정신병은 달(luna)과 관계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억압과 가난에 얼마나 시달리고 지쳤겠는가. 병은 우선 개인에게 원인이 있지만 길게 보면 사회가 낳은 문제다.

16절에서 제자들의 무능이 고발된다. 예수가 없던 상황에서 환자와 제자의 만남이 이미 있었음을 전제한다. 공동성서에서 환자치유에 실패했던 엘리사의 사례가 떠오른다.(열왕기하 4,29-31) 오늘 그리스도교의 무능과 게으름을 사람들이 예수에게 고발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세대’는 70인역 신명기 32,5를 가리킨다.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시편 6,4; 13,2-; 35,17과 이어져 있지만 “이 못된 사람들은 언제까지 나에게 투덜거릴 것이냐?”(민수기 14,17)와 가장 가깝다. 17절 예수의 답변은 조금 의아하다. 너그러운 예수가 푸념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거부하는 유다교 지배층과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섭섭함이 뒤섞인 응답이겠다. 예수도 사람인데 얼마나 지치겠는가. 짜증내는 예수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보인다. 환자 치료에 지친 의사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인류는 의사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알브레히트 뒤러, 1506년
제자들이 치유하지 못한 원인을 마르코는 ‘기도하지 않음’(마르코 9,29)으로 들었는데 마태오는 20절에서 ‘믿음이 작음’으로 바꾸었다. ‘산을 옮김’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대명사로 유다교 문헌에 보인다. 산을 옮김에 대한 예수의 표현을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산을 옮김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공동성서는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산을 옮길 수는 없다. 그런 사례가 여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허황된 믿음을 부추기거나 합리적 믿음을 묵살하지 않는다. 제자들의 허술한 믿음을 탓하기 위해 예수는 그런 과장법을 쓴 것이다. 예수의 그런 의도를 모르고서 여전히 유사 의료행위를 시도하는 종교인도 있다. 가끔 언론에 등장하는 어이없는 뉴스를 보라. 종교인의 유사 의료행위는 상술과 선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시대에는 신학적으로 다시 생각할 문제다. 개신교의 이른바 ‘간증’을 나는 신학적으로 염려스럽게 보고 있다.

믿음은 산을 움직일 수도 없지만 남을 움직일 수도 없다. 믿음은 우선 나 자신을 움직인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움직이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지 않고서 남을 움직인 사람은 없다. 남을 움직이려고 애쓰지 말고 우선 자기 자신을 움직일 일이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회개’(회심)라고 부른다. 마태오에서 믿음은 가르침에 대한 지적(知的) 동의보다 예수에 대한 신뢰를 더 가리킨다. 그 신뢰는 자기개혁(회개)로 나타나야 한다. 회개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에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했기 때문에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를 알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제자들은 아직 믿음이 작았다. 예수와 같이 먹고 자고 돌아다닌 제자들도 겨우 저 모양이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오늘 단락을 교회의 믿음에 대한 경고와 비판으로 여겨야 하겠다. 세례를 받으면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착각, 목사나 신부로 살면 하느님께 특혜 받는다는 착각, 하느님은 심판 날에 그리스도교를 배려하리라는 착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수록 하느님에게 더 심한 질문을 기다려야 한다. 종교인이라는 핑계로 온갖 영예와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은 가장 가혹한 질문에 시달릴 것이다. 심판날에 특혜 받을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과 역사의 희생자 외에 아무도 없다. 하느님의 심판에서는 교황에게도 특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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