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9

9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10 그때에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습니다. 12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달았다. (마태 17,9-13)

▲ <타보르 산에서 그리스도의 변모> 세부, 조반니 벨리니(1455년)
예수의 변모 설화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의 대화가 오늘 단락의 주제다. 엘리야가 다시 와야 한다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예수의 답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유다인들의 기대를 예수는 성서 말씀을 빌어 인정한다(11절). 이미 일어난 세례자 요한의 사건을 예수는 나름대로 해석한다(12절). 사람의 아들이 고난 받을 것을 예수는 덧붙인다. 10절에서 질문한 제자들은 13절에서 깨닫는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같은 고난의 운명을 겪게 된다는 결론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정치범으로 처형되는 공동 운명이다.

9절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을 가리킨다. 앞서 나온 마태오 복음서 16,13-23을 반복하는 듯한 오늘의 단락이다. 16,14처럼 엘리야가 등장한다. 16,16.22처럼 베드로가 대표로 예수에게 말한다. 16,16 이하처럼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다. 16,20처럼 제자들은 침묵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말하는 9절과 12절은 16,21의 고난 예고와 잘 어울린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고난은 이미 마태오 복음서 11,12-14; 14,3-12에서 다루어졌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 27,54)라는 십자가 아래에서 군인의 고백과 13절은 내용상 연결된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난 변모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하느님의 소리였다. 마르코나 루카에선 들음보다 보는 것이 더 강조되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는 9절에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부활 때까지, 제자 아닌 사람들에게는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산 위에서 본 것보다 산에서 내려온 뒤 제자들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엘리야를 기다리는 유다인의 기대가 예수가 메시아임을 반박하는 논리로 사용된다는 것을 마태오 복음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에게 두 가지를 대답하신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는 것, 메시아는 고난 받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메시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예수가, 그리스도교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해석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르게 생각한다.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유다교는 주장한다. 예수가 온 뒤에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항변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메시아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있다고 반박할 것인가.

이론적 설명과 대응보다 실천적 접근이 더 중요하고도 어렵다. 무신론, 유다교, 이웃 종교와의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사실 이론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주장한 이론을 그리스도교가 실천하지 못해온 역사가 그런 대화에서 가장 부끄럽게 드러난다. 상대를 이론적으로 설득하기 힘들어서 겪는 어려움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현실 탓에 우리 자신이 느끼는 자괴감이 더 크다.

입으로는 큰소리치지만 속으로는 부끄러움에 가득 찬 그리스도교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대부분 내부에서 나왔다. 외부에서 희생양을 찾아 내부 문제를 회피하는 버릇이 그리스도교에 여전히 남아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즉 예수의 신성(神性)이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의 신성은 예수의 저항과 고난의 길에서 비로소 제자 아닌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제자들은 예수의 저항과 고난에서 예수의 신성을 느껴야 한다.

하느님의 특징이 저항과 고난이라는 내용은 예수가 인류에게 선사한 새롭고 놀라운 사상이다! 고통 받는 인류와 아픔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곧 하느님다운 특징이다. 억압 정치에서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특징이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나타났다면, 역사의 희생자와 같이 아파하는 하느님의 특징이 예수에게서 나타났다. 해방신학의 초기에 주로 이집트 탈출 사건이 주목되고 인용되었다. 지금은 예수의 저항을 더 부각시키는 편이다.

하느님은 이제 인류와 함께 아파하신다. 신성은 정복자 같은 폭력성에서 드러나지 않고, 역사의 희생자와 아픔을 같이 하는 공감(共感)에서 드러난다. 측은지심은 하느님다운 특징이다. 측은지심을 느끼는 사람은 이미 예수의 신성에 참여하고 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려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라. 측은지심은 인간을 하느님처럼 도약시키는 계기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고난보다 저항을 더 강조해야 한다. 저항에서 고난이 나온 것이지 고난에서 저항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순서를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길을 예수가 따른 것처럼 예수의 길을 제자들이 따라야 한다. 예수의 저항의 길을 그리스도교는 따라야 한다. 특히 목사, 신부 등 종교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지 않으면 아직 종교인이 아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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