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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내 정치적 소수자 생존기[레알청춘일기 - 오디]

대학생이 되어 처음 해본 투표에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전국에서 3%도 안 나온 것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이 소수 의견이라는 것을 피부로 맞닥뜨릴 일은 한동안 없었다. 입사 후, 내가 지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전 직원 통틀어 단 3명뿐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만 살았나 보다. 그나마도 그 3명은 집회에서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것이고, 그 전까지는 나 혼자인 줄 알았다. 점심 먹을 때나 회식 자리에서, 그리고 사소하게 이루어지는 수다에서 나는 그들이 무심결에 내뱉는, 예컨대 “저기 집회하는 사람들 빨갱이 아냐?”라는 말에 혼자 상처받았다.

“계약직이어도 괜찮습니다.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세 번 부정한 것처럼, 나도 당장의 생계를 위해 대학생 때 꿈꾸던 가치관을 부정했다. 대학 때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수백 번도 더 외쳤던 것 같았지만, 이제 나에게 중요한 건 계약직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회사를 상대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말 잘 듣고 다음해에 정규직이 되는 것이었다. 막상 나에게 닥친 일이 되고 보니,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 앞에서 내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을 감안하면서까지 주장을 펼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약직이라는 신분은 신경 쓸 게 많았다. 회사 워크숍에 내가 포함이 되는지 여부도 그 때 그 때 달랐고, 회사의 사사로운 복리후생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제외되는 건 둘째 치고 사석에서 “어라, ○○ 씨는 보너스 안 받았어요?”라고 꼭 눈치 없이 물어보는 정규직 선배들이 가슴에 비수를 한 번씩 더 꽂아주었다. 퇴근길에 부장님이 갑자기 시키신 일이 ‘내가 정규직으로 합당한지 시험해보고자 하는 건지’를 고민하며 군말 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일하고, 나의 본 업무와 관련 없는 일을 부여받을 때 “내가 계약직이라 그런가”를 고민하는 등, ‘일’ 외에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말단 계약직이라는 파리 목숨으로 살면서 내 신념에 대해 따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술자리 가십으로 일개 포털 사이즈 댓글 수준의 말을 할 때마다 속으로 끓는 화를 참느라 고역이었다. 종종 상사가 “주말에 뭐했어요?”라고 물을 땐 매우 막막했다. 나는 주로 주말에 집회에 가거나 내가 활동하는 노래패 연습을 하였는데, 대개는 “집에서 TV 봤어요”라며 둘러댔다.

그럴 때마다 ‘왜 굳이 둘러대야 할까?’라는 자존심과 ‘굳이 나의 정치색을 커밍아웃할 필요 없잖아’라는 귀차니즘을 빙자한 소극적인 마음이 부딪혔는데, 결국엔 후자를 택했다. 나름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 동료들에게 슬그머니 얘기를 시도해본 적도 있긴 한데, “왜 그런 데를 가?”라면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에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사에서 나의 사생활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하는 게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개인의 사생활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서울 시내 한복판, 집회가 매일같이 열리는 광화문 사거리의 빌딩 초고층에서 근무하면서도 집회의 주최가 누군지, 집회의 내용이 뭔지 모르며 지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무기력해졌다.” 사진은 지난해 5월,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8명이 각각 다른 이유로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문양효숙 기자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 역시 회사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11시간 이상 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와 잠들기를 반복하는 생활이 지속되면서 점차 집에 오는 주간지를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쌓아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도 높은 노동 때문에 퇴근 이후엔 더 이상 뭔가 사색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진짜 입에 풀칠해주는 것은 사회 참여 의식이 아니라 당장 부장님 눈 밖에 나지 않게 똑바로 일하는 것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웬 말인가. 나는 점차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회사 공금으로 먹는 회식에서 배 터지게 먹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배부른 돼지가 되어 갔다.

회사 끝나고 ‘굳이’ 뉴스를 안 보고도 할 게 너무 많은 사회였다. 자극적인 케이블 방송을 보며 말초적인 쾌락으로 오늘 하루의 시름을 잊는다. 정치적인 것 잘 모르고도 잘 굴러가는 사회인 것 같았다. 서울 시내 한복판, 집회가 매일같이 열리는 광화문 사거리의 빌딩 초고층에서 근무하면서도 집회의 주최가 누군지, 집회의 내용이 뭔지 모르며 지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무기력해졌다.

대학 때 사회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기는 꽤 어려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말이지 덕 봤다 싶은 면이 많다. 나는 계약직이나 여성이라는 신분이 회사라는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불평등을 경험하는지 대학 때 익히 듣고 보았다. 그래서 실제 그런 경험을 맞닥뜨렸을 때 별로 당황하지 않고 잘 버텨낸 반면, 자신은 절대 차별받지 않을 거라며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동료들이 결국 경험하는 차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나는 회사 내에서 내 의견을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 대신에 내 삶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로 증명해야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회사는 착한 사람보다 일 잘하는 사람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선 내가 맡은 일을 잘해내고 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퇴사하는 시점에 많이 느꼈는데, 많은 동료들이 내가 새로 하려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응원으로 많이 응원해주었다. 그제야 회사 다니는 동안 어떤 사람들에 대해 정치적으로 무지하다고 속으로 내심 무시하거나 멀리한 것을 반성하였고, 사람들과 좀 더 인간적으로 친밀해지지 못했던 것을 새삼 아쉬워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소수자로 사회생활을 하기에 조언자가 많이 없었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누가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나는 훨씬 편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것 같다. 당시에 20대 말단 사원 모임 같은 걸 조직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말단 사원들의 퇴근 시간은 그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정치적 소수자로서 잘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 신세 한탄하고 푸념할 벗조차 별로 없는 우리네 인생은 얼마나 각박한가. 이것이 우리의 레알청춘일기다.
 

오디 (필명)
서울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출신. 참여연대 회원 노래모임 참좋다 7년째 활동 중.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풀다가, 회사를 관두고 음악치료사가 되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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