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2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3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4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 베드로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6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다. 7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8 그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을 때는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태 17,1-8)

▲ <타보르 산에서 그리스도의 변모> 세부, 조반니 벨리니(1455년)
흔히 ‘예수의 변모(變貌) 설화’로 불리는 오늘의 단락은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9,2-8을 여러 곳에서 고쳤다. 요한이 야고보의 동생으로 정확히 불려지고(마태 4,21; 10,2) 모세와 함께 있던 엘리야(마르 9,4)를 마태오는 시간 순서대로 모세와 엘리야로 옳게 고쳤다. 마태오는 마르코보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더 정확한 식견을 드러낸다.

베드로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마르 9,6)이 아니고, 예수를 선생님(마르 9,5)이 아니라 주님이라 부른다. 결론 부분이 크게 바뀌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는데(마르 9,6.8), 마태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구름 속의 소리를 경청하고 땅에 엎드려 경배한다. 한마디로 마태오는 예수의 변모 설화에서 제자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다.

1절에서 엿새 후, 즉 일곱째 날은 완성의 날을 가리킨다.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세 제자를 데리고 간 것은 무슨 뜻일까. 열두 제자들 중에 더 중요한 새로운 계급을 예수가 만드신 것인가. 예수는 제자들 사이에 계급을 만드신 적이 없다. 그런 계급은 가톨릭교회의 창작품일 뿐이다.

산으로 올라가신 모습은 악마가 예수를 시험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마태 4,8-10). 유다교 지배층에게 미움 받고 저항과 고난의 길이 예고된 상황에서 마태오 복음서 4,8-10과 다른 긍정적인 대조를 오늘의 단락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해처럼 빛난 예수의 얼굴은 예수의 의로움을 나타낸다.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흰 옷은 부활 아침에 나타난 천사의 옷이다(마태 28,3).

모세는 민간 신앙에서, 엘리야는 열왕기 하권 2,11에서 하늘에 있는 사람들로 믿어졌다. 그들은 다가올 메시아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로 오늘의 단락에서 등장한 것으로 많은 성서학자들은 해설한다. 그러나 5절은 율법을 전해준 모세보다 예언자 모세를 연상시킨다(신명 18,15). 엘리야가 왜 예언자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가? 모세와 엘리야를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라고 해설한 독일 가톨릭 성서학자 그닐카(Gnilka)의 의견에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모세와 엘리야는 단순히 하늘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 것 같다.

베드로가 느닷없이 초막, 즉 텐트를 짓겠다고 제안한다. 설교자들이 보통 그냥 지나쳐 버리는, 그러나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베드로가 초막절 축제를 위해 그럴 리는 없고, 의로운 사람을 위한 하늘의 거처(요한 14,2; 묵시 21,3)를 산에 마련하겠다고 나설 리도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고난을 예방(마태 16,22)하려고 산에 은신처를 마련하려는 것일까. 무력투쟁을 위한 군사기지를 여기서 상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예수의 신성(神性)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제자들의 참여 의지를 강조하는 구절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5절의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나타낸 소리와 같다(마태 3,7). 예수는 하느님과 일치하며(마태 1,18-25; 3,17) 사탄의 힘을 이기고 하느님을 존중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마태 4,1-11).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저항과 고난의 길을 겪는 사람의 아들이다(마태 17,12). 그런 예수의 길을 제자들은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의 말을 듣고 따르라는 구름 속의 소리다.

모세가 아론, 나답, 아비후를 데리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탈출 24,1-11)을 예수의 변모 설화와 연결시키는 학자들이 많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산의 구름을 연상하거나(창세 22,2.12) 유대교의 초막절 축제와 연결하거나(레위 23,27.34) 이집트의 황태자 대관식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단락은 마태오가 여러 전승을 토대로 독창적으로 꾸민 작품인 것 같다. 예수의 변모 설화는 특히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축제와 이콘에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된 예수가 기념되었다. 변모 설화는 서유럽 그리스도교에 의화론(義化論)이 끼친 영향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며 예수의 신성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주로 해설된 오늘의 단락은 신자들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변모 설화의 근원을 추적하다 보니 정작 그 메시지는 교회 안에서 덜 강조된 것 같다. 산에 대한 경외심도 예수 시대와 달리 많이 사라졌다. 설화가 주는 감동도 많이 줄어들었다.

산 사나이 예수가 산에서 등장하는 장면은 예수 생애의 중요한 계기를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서 처음(악마에게 유혹받음, 마태 4,8)에, 중간(변모 설화, 마태 17,1)에, 마지막(부활 후 나타남, 마태 28,16)에 예수는 산에 있었다. 십자가 처형 장소가 산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산은 예수의 생애를 떠올리고 기도하는 곳이다.

오늘의 단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 첫째, 예수의 신성(神性)은 예수의 저항과 고난의 길에서 드러난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의 저항과 고난의 길을 막지 말고 뒤따르라. 예수의 고난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고난의 길을 회피하려는 풍조가 그리스도교에 있다. 예수의 고난을 강조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을 모른 체 하는 분위기가 그리스도교에 있다. 예수의 고난을 강조하면서도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는 설교가 그리스도교에 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전례(성례전)를 거행하기 위해 태어난 종교가 아니다. 교회와 성당에서 벗어나 저항과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오늘 그립다. 그리스도교는 종교 이전에 역사다. 역사를 외면하는 그리스도교는 그저 박물관에 불과하다. 불의한 체제와 세력에 맞서 저항하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아직 예수를 모른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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