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여경]

얼마 전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을 읽었다. <사천의 선인>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 된 자본주의의 사회구조 속에서 과연 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착한 사람 셴테가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혹한 인물 슈이타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선의 실현’이라는 이상과 ‘생존’이라는 현실이 공존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 착취를 바탕으로 한 구조이기에 끊임없이 누군가를 착취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셴테의 ‘착함’, 즉 ‘이타심’은 착취를 용이하게 해 그녀를 갉아먹게 된다. 따라서 셴테는 계속해서 먹을 것과 돈, 잠 잘 곳을 요구하는 이웃들에게 시달리고,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당한다.

낭만적 사랑을 믿고 이웃의 호소를 뿌리치지 못하는 셴테는 그 사실 때문에,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결국 유일한 생계수단인 담배 가게를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셴테는 더 이상 ‘착한 셴테’로 살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리하여 냉정하고 경제적 이해타산에 밝은 사촌오빠 ‘슈이타’가 되어 담배 공장을 세우고 자본가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도덕법칙과 현실의 냉혹한 생존법칙 사이에서 셴테가 보이는 분열은 지금 우리가 처한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우리들도 매순간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아를 개조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지 않은가? “최소한 사냥꾼의 대열에 끼어 있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바우만의 비유는 잔혹해 보이지만, 그 잔혹함이 곧 우리의 현실이다. 사냥꾼이기를 포기하면 사냥터의 사회구조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슈이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슈이타로 살아가는 것이 셴테를 구원하고, 셴테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주었는가? 셴테는 슈이타로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는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슈이타가 아니라 셴테만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셴테에게 남은 대안은 무엇인가? <사천의 선인>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며 그에 대한 해답과 해결을 위한 노력은 우리―관객의 몫으로 남게 된다.

▲ 10월 초, 밀양을 방문했을 때, 동화전마을에서 만난 소녀가 꺾어다 준 국화꽃 ⓒ여경

여기서 우리는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신자유주의 시대가 소멸시킨 착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을 되찾으려는 시도로서 우리는 다시 셴테가 갖고 있는 가능성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셴테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실패한 인간, 약한 인간으로 평가될 테지만, 그녀는 다른 이기적인 인물들과 달리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리하여 속물화에 저항하고 있는 인물이다.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희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했던 것이다.

이러한 셴테의 모습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강정의 지킴이들, 밀양 할매들, 길거리에서 농성 중인 수많은 노동자들이 바로 불편함과 모순을 직시하고,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살아내는 우리 사회의 셴테들이라 하겠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윤리,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선인들로부터 우리는 인간애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발견하고, 아직 꺼지지 않은 양심의 불씨를 살려낼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양심과 노력에만 의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셴테가 봉착한 문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러한 윤리성을 누군가에게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저항적 사유와 활동을 이어가려면 경제적 조건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윤리’에 대해 고민하며 셴테처럼 지낼 수 있는 것도 나의 생계를 유지시켜 주는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안에 없었을 뿐, 나의 삶에도 부모가 슈이타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점점 졸업이 다가오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이 더해가면서 나도 슈이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졸업 후에 스스로 생계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지금처럼 내가 ‘좋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자신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셴테의 딜레마를 고민하다보면 인간다움의 기초,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양심을 따를 수 있고 자기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으려면, 그리하여 슈이타가 되지 않으려면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물적 기반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본소득 등의 보편적 복지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셴테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셴테는 부조리한 구조에 의해 소멸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안에 억압되어 웅크려 있을 뿐 ‘좋은’ 삶, ‘함께 즐거운’ 삶에 대한 고민과 안간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는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여경 (요안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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