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님을 생각하며

최근, 지난해 4월 27일 선종하신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참에 1987년에 가톨릭농민회에서 발간한 농민교리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된 <밥도 먹고 말도 하고>라는 소책자를 읽고서 깊은 감회에 젖었다. 참 솔직하고 강직한 사제, 정말 농민들을 사랑했다는 느낌이 문장 한 올마다 배어나는 사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살면서 정 신부님을 딱 세 번 뵈었다. 청년 시절 선배와 함께 경북 함창본당의 허름한 사제관에서 처음 뵈었을 때만 해도 그분을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청량산 자락 봉화 비나리에서 농사짓던 노 사제를 두 번째로 뵈었다.

마을 이름이 ‘비나리’. 일하면서 기도하기 좋은 땅이라는 뜻일까? 신부님은 오랫동안 가톨릭농민회 일을 맡아 보시다가, 이윽고 스스로 집을 짓고 시골에 들어가 농민이 되기로 작심하셨던 것이다. 벼농사는 물론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손질해 왔다. 신부님을 보며 땅을 매만지고 사는 것이 곧 하늘을 매만지고 사는 것이라는 걸 그분 얼굴에 패인 주름과 깊은 말씨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오윤, 미륵반가사유상,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

▲ 정호경 신부
신부님께서 서재로 쓰시던 작은 방은 황토 빛이었는데, 책상 옆에는 손목시계와 조각도가 걸려 있었고, 손수 그린 할머니 그림, 오윤의 판화 한 점과 미륵반가사유상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당신께서 묵상하며 성경 구절을 골라 새긴 목판. 신부님은 가지런히 놓인 이 목판들을 모아 전각성경 <말씀을 새긴다>(햇빛출판사, 2007)라는 책으로 펴냈다.

몸이 이젠 예사롭지 않은 듯한 신부님은 그날 영문판 빈센트 반 고흐의 도록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흐의 그림이 다수 발굴되어 실려 있다는데, 요즘 이 책을 틈틈이 번역하며 소일하고 계신다 했다.

그분이 고흐를 만년의 사랑받이로 삼으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흐는 처음부터 화가가 아니었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픈 마음에 광산촌 보리나주에 들어가 움막에 살며 광부처럼 살았다. 검댕이 묻은 얼굴로 그들과 예배를 보고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결국 허름한 예배가 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나서야, 목탄으로 광부들을 그리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가 손끝을 움직일 때마다 익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감을 얻었다.

후기에야 해바라기 그림처럼 하느님을 갈망하는 자연 풍광이 주종을 이루지만, 고흐의 초기 작품은 주로 우편배달부, 감자 먹는 사람들 등 가난한 이들뿐이었다.

동생 테오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던 가난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그림은 대개 소품이었다. 비싼 캔버스와 물감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교회당은 늘 ‘불이 꺼져 있었다.’ 그가 볼 때 교회는 언제나 부자들에게만 문을 열어주었으며, 성령이 머물지 않는 공간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교회 바깥 풍경은 늘 태양으로 인해 눈부신 색채로 빛났다. 마치 하느님께서 이제는 교회 밖에 현존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 자 구하려면, 내가 먼저 가난하여

마지막으로 그분을 본 것은 2010년 늦가을 정호경 신부님의 오래 묵은 벗이었던 류강하 신부님 장례 미사 때였다. 그리고 2년 후 정 신부님은 류 신부님과 같은 폐섬유화증으로 선종했다. 정호경 신부님은 본시 예술적 감흥을 지닌 글쟁이였다. 그의 신앙은 농민의 마음으로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 모시는 신앙이었다.

그분은 <밥도 먹고 말도 하고>에서 이렇게 적었다. “하루도 거르지 못하고 농민의 피땀인 ‘밥’을 널름널름 먹어치우는 내가,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는 생명의 길에 무관심 또는 외면하면서 날름날름 ‘성체’를 먹어치우는 놈이라는 부끄러움을, 작게나마 줄여 보고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고. 농민과 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그를 천상으로 인도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사제였기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도 단순하고 투명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시골 여자 마리아를 통하여 짐승의 밥통에서 나셨고, 가난한 노동자로 사시다가, 가난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신 결과, 백성을 선동하고 왕이 되려고 했다는 죄로 십자가 참형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를 분명히 확인합니다. 저 낮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하느님이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처럼 짧은 언어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꿰찌른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덧붙여 정호경 신부님의 부탁으로 <해방하시는 하느님>에 실린 ‘농민의 노래’를 지은 권정생 작가 역시 그와 한 통속이다. 한 구절을 들추어 보자.

“우리주님 사람되어 이세상에 오시었네
하늘자리 버리시고 낮은데로 임하셨네
갈릴래아 목수아들 아기예수 나신곳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짐승들과 함께했네
여관에서 쫓겨나고 갈곳없이 헤매다가
추운들판 버려진몸 목동들이 맞이했네
천하보다 귀한예수 어찌하여 마구간에
누일곳도 없으시어 구유안에 누우신고
하느님의 뜻이라오 가난한자 구하려면
내가먼저 가난하여 아픈마음 알음이라”

사실 이 구절이야말로 복음서의 핵심이다. 다른 모든 글귀가 사족이요 부연설명이다. “가난한 자 구하려면, 내가 먼저 가난하여 아픈 마음 알아야” 한다는 말씀. 그 마음을 알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자연스럽다. 더불어 아프고 더불어 먹고 더불어 기뻐하는 일만 남아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교회 안에서도 묻혀버린 지 오래다.

▲ 봉화 비나리 집 수돗가에서, 정호경 신부 ⓒ한상봉 기자

주교들은 BMW 타고, 교황은 30년 된 중고차 타고

다행히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난의 영성’을 다시 먼지가 폭폭하게 쌓인 교회 곳간에서 끄집어내고 있다. 지금 배부른 자는 불안해질 것이다. 지금 권세 있는 자는 모골이 송연할 것이다. 그가 사제라면 우울증 걸리기 십상이고, 그가 수도자라면 입고 있는 유니폼이 불편할 것이다. 골프채 잡은 손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경직될 것이다. 그분이 너를 모른다 할 것이라는 복음 말씀이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독일 림부르크 교구장인 프란츠 페터 테바르츠 판 엘스트 주교가 자신이 사용할 주교관을 무려 3100만 유로(한화 약 452억 원)를 들여 신축하면서, 이 호화판 주교관에 대한 항의가 잇따랐다. 결국 교황은 지난 10월 23일 이 주교에게 직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시사IN> 보도에 따르면, 이 주교는 230만 유로를 들여 대리석 회랑을 만들고 수입 방탄유리로 주교관 창문을 달았다. 욕조에 1만 5천 유로, 정원에 78만 유로 등 호화판 ‘아방궁’을 만들었다.

현재 독일 교회의 교구장 주교 25명 가운데 13명이 BMW 리무진을 타고, 9명은 벤츠나 아우디 리무진을 몰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 개혁은 천천히 아주 구체적이고 작은 것부터 시작하겠다”고 공언해 온 교황은 지금도 30년 된 르노 중고차를 몰고 다닌다. 그 교황이 “신부와 수녀들이 자동차 전시관에서 기웃거리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 관심을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쏟아야 한다”라는 말까지 했으니, 그동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장관급 예우를 받아왔던 주교들이 ‘좌불안석’일 게 뻔하다. 한국 교회라고 다를 게 없음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사제서품과 동시에 승용차를 선물 받는 게 관행이 되어 온 한국 교회에서 주교든 사제든 ‘눈치가 보여’ 중고차 시장에 한번 나가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난의 영성’이 다시 교회에 참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사이에, 세상의 가난한 이들이 다시 교회를 호출하고 있다. 정의평화위원회가 유명무실했던 교구에서 오히려 활동이 왕성해졌다. 대구대교구는 4대강 시국선언 당시 3명이던 교구 사제들이 최근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관련 시국선언에는 103명이나 참여했다. 보수여당의 텃밭에서 발생한 일이니 놀랄 만하다. 대전교구처럼 사회교리학교가 활성화된 교구도 찾아보기 어렵다. 수원교구는 두물머리를 중심으로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줄곧 펴왔고, 쌍용차 문제에도 열성을 보여 왔다. 특히 국정원 관련 시국미사에 교구장 이용훈 주교까지 참여해 교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모두가 ‘이명박 대통령의 은덕’이라고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라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온갖 패악과 탐욕을 부려 ‘얌전했던 천주교회’조차도 각성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4대강 사업을 통해 전 교구의 사제들이 나라 문제로 결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저주를 축복으로 뒤바꾸는 성령이 한국 교회를 보살핀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각성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을 향해 ‘정의’를 말하려면, 먼저 교회가 정의로운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제들이 복음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겸손과 자비와 공정함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사제 갱신은 수도자들의 갱신 뒤를 따라올 것으로 추측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도자들은 예언자”라고 콕 집어 말했고, 수도자들이 예언직분을 수행하면서 일으키는 “시끄러운 소동”마저도 축성했다. 교황은 수도자들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라고 이른다.

▲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수원교구 시국미사에 참석한 수도자들 ⓒ한수진 기자

변방에서 오히려 행복한 교황과 수도자, 그리고…

최근에 강정과 밀양에서 보여준 수도자들의 모습은 교황의 말마따나 “교회가 야전병원”임을 드러내 주었다.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있는 한반도의 ‘변방’이 강정이고 밀양이다. 제도보다 카리스마에 더 마음을 쓰는 수도자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시대의 징표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고, 40대의 젊은 아빠스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선출되는 것을 지켜보며, 정말 성령의 바람이 언제 어느 방향으로 불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가톨릭교회는 구조상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게 긴요하다. 공동체 안에서 자매, 형제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균형감과 진취성을 갖춘 장상, 전통 안에서 늘 새로운 것을 끄집어낼 줄 아는 사람이 지금은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먼저 준비된 백성이 있어야 한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네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이 있어야 한다. 고통 받는 현장에서, 삶의 남루한 변방에서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들이 ‘정의의 느티나무 숲’을 이뤄야 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이 글은 <영성생활> 제46호에 실린 글을 수정 ·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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