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7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입니다. 28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태 16,24-28)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20년)
예수의 고난과 제자들의 고난은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고난은 저항에서 오는 것이니 제자들의 저항은 예수의 저항과 연결된다. 진정한 예수 이해는 예수를 따름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마태오는 마르코에게 배웠다(마르 8,31-34; 9,30-37; 10,32-45).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 심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태오는 강조한다(마태 7,21). 오늘 말씀의 결론인 24절에서 마태오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 따름의 조건을 알려주고 있다.

“자기를 버리는”, “제 십자가를 지는”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오해를 가져오고 잘못 사용되었다. 그 표현은 고통의 찬미, 염세주의와 아무 관계없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잘못 사용되는 책이 <준주성범>이다. 잘못된 사회 체제를 그저 참고 받아들이라는 말과도 아무 관계없다. 몸, 감정, 성(性), 예술, 세상을 무시하는 경향과도 아무런 관계없다.

그러나 그 단어는 불의한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고, 성직자에 대한 신자들의 복종을 교육시키는 아편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그렇게 가르친 설교자들이 참 나쁘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복종, 순종이란 단어를 나는 불쾌하게 여긴다. 유신 시대, 군사정권 시대에 그런 단어를 듣는 신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복종, 순종 같은 독재적 단어보다는 ‘존중’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예수를 버린다는 말과 대립되어 생긴 단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를 버리지 않고 예수의 삶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불의한 체제에 대한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 저항 의지의 표시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생한 현실을 가리킨다. 목숨 걸고 저항한다는 뜻이다. 고통이라는 단어보다 저항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교에서 더 자주 쓰여야 한다. 예수를 따르지 않은 채 자기를 버리거나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아무 의미 없다.

25-26절은 반어법 형식으로 예수 따름을 촉구한다. 26절은 돈에 대한 소유욕을 강력히 비판한다. 마태오에 따르면 자기를 버림에 있어 핵심은 소유에 대한 탐욕을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 된다는 표현은 성서에 없을 뿐더러 성서 정신과 관계없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이요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렇게 남을 속이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런 속임수에 가담하는 사람도 자기 잘못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사기꾼 옆에는 언제나 공범이 있다. 독재자 옆에는 언제나 협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라는 27절 말씀은 개신교 성서신학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은총으로만 구원된다는 개신교의 가르침이 27절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은총만으로 구원된다는 가르침은 심판 날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인가. 이 어려움은 여전히 개신교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다.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사상은 바울도 모르지 않았지만(로마 14,12; 1코린 4,5; 2코린 5,10) 개신교는 바울의 그런 구절을 소홀히 취급하여 왔다.

28절 역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가져온 구절이다. 예수 당대에 세상 종말이 다가온다고 해석한 사람도 있었다. 예수가 종말 예측에 실패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세상 종말은 교회가 나타남을 가리킨다는 해설도 있었다. 28절은 예수가 진짜 하신 말은 아니라는 해설이 19세기부터 나타나 예수의 부담을 덜어주게 되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마태오는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시대정신 아래에 살았던 사람이다. 마태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단락은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마태오가 오늘의 단락에서 그리스도론적 교리를 만들진 않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알려준다. 첫째, 실천 없는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마태 7,21-23). 둘째,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불의한 사회에 대한 예수의 저항을 따르는 것이다. 저항에 따르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지금 신자들은 예수의 고난보다 예수의 저항에 대해 더 많이 더 자주 배워야 한다. 셋째, 최후 심판은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하신다. 심판은 교회가 하는 것도 아니요, 신학자나 성서학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판사는 예수요, 증인이자 배심원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1980년 3월,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죽음과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등장으로 혼란스런 시기였다. 그때 중미 엘살바도르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군인들 총에 피살되었다. 로메로의 삶은 영화나 책으로 우리에게 조금 알려져 있지만, 로메로를 방해한 주교들의 나쁜 행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로메로 편을 든 주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주교들은 로메로의 행동을 교묘하게 방해하였다.

300여 명의 국내외 성직자들이 참여한 로메로의 장례 미사에 엘살바도르 주교는 단 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장례 미사가 열린 성당 정면에 가난한 사람들이 내건 커다란 현수막은 이렇게 말했다. “주교 아파리시오, 리벨로, 알바레스, 델가도, 그리고 미국 대사는 입장 금지.”

가톨릭 신자들인 가난한 사람들이 가톨릭 주교들의 미사 참여를 거부한 것이다. 그 주교들은 하느님께 심판받기 전에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심판받았다.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가난한 사람들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종교인들은 그런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종교인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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