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6

21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다. 22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보시고 “사탄이여, 물러가시오. 당신은 내게 장애물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군요!” 하고 꾸짖으셨다. (마태 16,21-23)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20년)
마태오 복음에는 “그때부터”(apo tote)라는 표현이 4,17과 16,21에 두 번 나온다. 4,17부터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하늘나라 선포를 다루는 마태오 복음 본론의 첫째 부분이 시작된다. 오늘 단락 16,21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저항의 길을 다루는 둘째 본론이 시작된다. 주제와 장소가 동시에 바뀌는 것이다.

갈릴래아가 예수에게 복음 선포의 장소라면 예루살렘은 저항과 죽음의 장소다. 크게 보면 갈릴래아의 군중은 예수를 따랐지만 예루살렘의 군중은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다. 가난한 사람들도 분열한다.

대부분의 주석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길에 ‘고난의 길’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루즈, 그닐카, 슈바이처 등 쟁쟁한 성서학자들도 그렇게 했다. 틀린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까. 예수의 결단과 활동을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은 없을까. 나는 ‘고난의 길’보다 ‘저항의 길’이 좀 더 적절하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밀양 할머니들이 고난 받으러 갈까, 저항하러 갈까 생각해보자. 앞서 출판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에도 이 대목에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 <슬픈 예수>의 부제(副題)는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다.

예수는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까. 어리석은 필자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성서에 나타난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설명을 물론 모르지 않는다. 예수의 공식 활동 기간은 짧으면 1년 반, 길게 보아야 겨우 3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구석구석을 예수가 모조리 돌아다닌 것도 아니다. 부처나 공자처럼 제자도 많이 받아들이고 수십 년 더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예수는 왜 그리 결단의 시간을 앞당겼을까. 예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말릴 수 없는가. (그 사정이 다르고 내막을 내가 잘 알지 못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오래 살면서 투쟁하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고 하지만 아쉬움은 진하게 남는다.

21절에서 어떤 성서 사본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록되었다.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슈바이처도 그렇게 따르고 있다. 신약성서 연구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공인본 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1993)은 ‘예수’로 표기하였다.

21절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운명을 따른다. 둘째, 적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정확히 거명한다(naming). 자신의 운명을 안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법이다. 예수는 자기 운명을 알고 운명을 따르신 분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적대 세력이 누구인지 예수는 정확히 파악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정세와 종교 동향을 예수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최후의 시간에 원로들과 대사제들은 전면에 등장하고 율법학자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마태 26,3.47; 27,1.3.12). 고난을 받음은 의로운 사람들과 예언자들의 운명이다(예레 2,30; 11,18-; 20,2).

22절에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인으로 나서 예수를 말린다. 바로 앞 단락에서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예수의 수석 매니저로서 예수를 움직여보겠다는 개인적 야심에서 그렇게 했을까. 고난보다는 영광의 길을 가겠다는 제자들의 집단적 의사 표시를 베드로가 예수에게 전달한 것인가.

성서에는 소설 주제가 널려 있다. <다빈치 코드> 저자만 그것을 눈치 챈 것은 아니겠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베드로는 개인으로서 말한 것이 아니다. 즉, 예수의 제자들 모두 고난의 길을 싫어하였다는 사실이다. 어디 당시 제자들만 그럴까. “주님, 안 됩니다” 하고 말리는 종교인들이 오늘도 수두룩하다.

23절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돌아보시고” 꾸짖는다. 스승이 앞장서고 제자가 뒤따르는 것이 당시 예절에 속한다. 저항의 길에서 선두에 서는 예수의 모습을 마태오가 강조하려는 것이다. 실제 전투에서 고위 지휘관은 지하 벙커에 숨어 지휘하는 것으로 육군 하사 출신인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추기경, 주교, 목사, 신부들은 저항과 고난의 현장에서 먼저 나타나고 앞장서야 한다. 고난은 내가 먼저, 영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그렇게 사는 길이 종교인의 길이다. 예수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난의 현장에서 고위 성직자나 대형교회 목사를 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2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장애물”(skandalon)이란 말을 듣는다(이사 8,14; 로마 9,33; 1베드 2,8). 영어 단어 스캔들(scandle)은 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진짜 스캔들은 연예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도 예수에게 스캔들을 일으키는 종교인들은 많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을 정도로 대우받은 베드로가 이제 “사탄”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지상 최대의 영예와 지상 최대의 모욕을 베드로는 동시에 받은 것이다. 베드로처럼 영예와 모욕을 같이 받은 사람은 인류 역사에 아무도 없다. 살면서 온갖 영예를 누리는 종교인들은 베드로의 경우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이런 다양한 타이틀은 사실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 허위의식에 매혹되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탓이다. 베드로의 경우가 남의 일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단은 예수에 대한 정보의 양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심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실천의 문제다. 그 결심은 종교적 신분이나 지위와 아무 관계가 없다.

성서 해설의 목적은 예수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예수는 참 훌륭한 분이셨구나’와 ‘나는 예수를 따르겠다’는 문장은 그 의미가 같지 않다. 예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마음을 격려하는 것이 성서 해설의 목적이다. ‘슬픈 예수’는 그런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