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5

13 예수께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합니까?” 하고 물으셨다. 14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당신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당신은 복이 있습니다. 18 잘 들으시오.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19 또 나는 당신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 16,13-20)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20년)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13-16),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말씀(17-19),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당부(20),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서 16,21-28과 내용상 이어지며 마태오 복음 전체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14절은 마태오 복음서 14,2.5를, 16절은 마태 14,33을, 17절은 마태 13,16-과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마태 11,25-27을 연결한다. 19절은 마태 18,18; 23,13을, 그리고 특히 유다교 최고의회 심문 장면인 마태 26,61-64을 이어준다.

교황 제도와 관련된 18-19절은 아마도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부분이다. 오늘 단락에 대한 연구는 엄청나다. 그 주요한 작품만 골라 읽어도 벅찰 정도로 많고 또 복잡하다. 어지간한 전문가도 그 작품들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

13-16, 20절은 마르코 복음서 8,27-30을 대본으로 삼았다. 마르코 복음서에 비해 두 가지가 달라졌다. 마르코 복음서 8,31의 “사람의 아들”이 삭제되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재림 엘리야로 여기는 장면이 14절에 추가되었다. 17절은 마태오가 창작한 것 같다.

18절과 19절은 각각 독립된 구절인 것 같다. 18절은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다. 18절의 유래는 크게 세 가지로 논의된다.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 아람어를 쓰던 공동체의 작품, 그리스어를 쓰던 공동체의 작품. 18절에 대한 주요한 문헌을 소개하기에도 지면이 부족하다.

18절을 예수가 친히 하신 말씀이라는 주장은 오늘의 가톨릭 성서학자 중에도 찾기 힘들다. 18절은 예수가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교회”(ekklesia)라는 단어다. 그 단어는 공관복음서(마르코 · 마태오 · 루카) 전체 중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온다.

이 구절이 마태오에서만 보인다는 사실이 이 말씀의 진정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마태오 복음서 18,17에 한 번 더 나오는데, 하나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에클레시아’(ekklesia)는 예수가 쓰던 단어가 아니었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한데 모으려 했지, 그중 일부를 따로 모아 조직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18절의 ‘에클레시아 모우’(ekklesia mou)는 유다교 회당과 분리된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하는 단어다.

18절을 마태오가 창작한 것 같지는 않다. 18절의 단어 케파(kepha), 페트로스(petros)를 분석해보면, 18절은 결국 그리스어 공동체보다 아람어 공동체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8절은 베드로의 활동을 뒤돌아보는 시점에 만들어진 것 같다. 베드로의 역할에 대한 의심보다는 존중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18절은 예수가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성서신학의 연구 성과는 오늘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교황권 문제는 성서학의 문제가 아니라 교의신학(조직신학)의 문제겠다. 예수가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 신학의 상식에 속한다. 역사의 예수는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지만, 신앙의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예수의 뜻을 이어갈 임무와 책임을 맡기셨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등장한다. 16절 베드로의 고백은, 앞서 나온 제자들의 신앙고백(마태 14,33)에 이어 두 번째 고백이다. 공동체의 고백은 개인의 고백보다 중요하다. 19절 “열쇠” 문제는 베드로의 역할을 암시한다. 열쇠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결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최종적으로 맡은 역할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갈릴래아 지방의 가난한 어부가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는 최후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는 언변도 뛰어나지 않고 학식도 높지 않은 가난한 노동자였다. 그는 예수를 믿고 따르다가 배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 죽음으로 믿음을 끝내 증거한 사람이다. 단 한 번의 회개로 평생을 일관한 바울보다는, 믿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에게 더 가깝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다. 베드로는 마리아보다 더 잘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논란이 많고도 중요한 오늘의 단락이,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다. 외람되게 말하면, 오늘날 신학자와 일선 교회 사이에 시차나 세대 차이가 아니라, 시대 차이가 존재한다. 예수에 대한 이해에 있어 신학자와 신자 사이에 그만큼 간격이 벌어져 있다. 신자와 신학자 사이를 연결할 임무를 맡은 설교자들(목사, 신부)이 거의 태업(怠業) 수준이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성서 교육, 교리 교육, 설교가 부실하다 보니 독학하는 평신도가 차츰 늘어났다. 세상에서 제일 유식한 ‘네이버 지식인’이나 ‘위키피디아’로 신학 정보를 탐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독학 신학자들이 생긴다. 그들 중 일부가 이단에 빠지거나 자칭 신학자로 행세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그들을 나무라는 것은 마치 신용불량자를 만들어놓고 사채 쓰지 말라며 훈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서 교육을 엉터리로 해놓고서 ‘신천지’ 예방 교육만 몰두하는 꼴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누구 책임인가.

오늘의 단락에서 무엇을 배울까. 첫째, 많이 연구되는 주제가 반드시 중요한 주제는 아닐 수도 있다. 덜 주목받아온 구절이 덜 중요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둘째, 교파적 이해관계에 억압된 성서 연구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 교파 이해로 시달리는 신학자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신학자처럼 자기검열에 능숙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월급 주는 고용주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초대해준 단체의 입맛과 돈 봉투를 주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한다. 신학자는 무엇이 자신의 신학 연구를 방해하는지 재빨리 깨달을 필요가 있다.

셋째,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는 서로 존중하고 배워야 한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주요 학자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주요한 학자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슬퍼하는 분위기가 오늘의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내부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스도교 분열 시대에 생긴 앙금을 우리가 상속받을 이유는 없다. 교회 분열의 논리를 확대재생산하여 서로 헐뜯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이 못마땅하다. 신도들도 사석에서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같은 점이 다른 점보다 훨씬 많다. 서로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서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개신교와 가톨릭은 형제, 자매 사이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분열의 상징이 아니라 일치와 화해의 상징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교황이 그리스도교의 분열 요인이 아니라 화해의 계기로 바뀌길 빈다. 교황이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평화를 이루는 길의 선두에 서길 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존재하기보다,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선봉이 되길 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에 대한 과장된 주장을 자제해야 한다. 개신교 성도들은 교황에 대한 악의적인 오해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성숙한 개신교 성도는 교황에게서 좋은 점을 이미 배우고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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