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Basilica di Santa Chiara

고딕-움브로(Gotico-Umbro) 양식인 글라라 대성당에는 1206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에게 특별한 소명을 준 비잔틴 양식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12세기 중엽 아시시 출신의 작자 미상의 작품)이 있다. 이곳에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았던 글라라 성녀의 유품과 의복들이 보관되어있다. 원래 이곳에는 성 그레고리오(S. Gregorio) 옛 성당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8년에 글라라 대성당에서 성인으로 반포되었다. 1255년 글라라가 성녀로 공인된 후에 1257-1265년에 걸쳐 글라라 수녀원과 대성당이 건축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 - 성 다미아노 십자가

대성당에는 글라라(Chiara) 성녀, 아녜스(Agnese) 성녀와 복자 베아트리제(Beatrice), 그리고 그녀들의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 무덤이 있다. 그녀들은 모두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수녀들이었다. 글라라 성녀 사망 4년 후 그리고 1255년 9월 26일의 성녀 반포 2년 후인 1257년에 대성당 건축이 시작되어 1265년에 완공되었다. 그 해 10월 3일 글라라 성녀의 시신이 성전 제대 아래에 안치되었다.

 

성 글라라 대성당 내부


글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혔던 그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살아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극진히 따랐고 이곳에 7년을 머물렀으며 죽어서는 묻혔다. 대성당 건축을 누가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성당의 정면은 수바시오 산 흰색과 붉은 색 돌의 줄무늬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 출입문은 사자 두 마리로 테두리 되어 비스듬하게 각이 졌다.

 


대성당은 내부 전체가 프레스코화로 덮여있어야 했는데 1719년에 그림 보수를 위한 비용이 부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흰색으로 남아있다. 성당 왼쪽 옆면에는 뚜렷한 자태를 드러내는 세 개의 거대한 상향 원기둥이 전체 균형을 잡기 위해 솟아올랐다. 대성당 종탑은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팔각형 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장엄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우뚝 솟았다.

성녀 글라라 이콘

 성당 제대 위에는 폴리뇨(Foglino) 출신 벤베누토 벤베니(Benvenuto Benveni)의 1265년 작품인 ‘코르티나 성모’(Madonna della Cortina) 이콘 이 있다. 통과 경당 높은 곳에 년도 미상의 프레스코화 시리즈가 위치해있다. 구약의 장면들로 구성된 프레스코화 시리즈 가장 위 부분에 동물의 창조, 그 아래쪽에 방주 건설, 인류의 시조 창조, 그들의 불순종과 홍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1200년 말 아시시 출신의 한 화가의 작품이다.

통과 경당 제대 뒤쪽의 오른쪽 부문에는 벤베니의 1283년 작품인 십자가를 손에 든 글라라의 모습과 그녀의 삶을 담은 8장면이 큰 목판에 가득하게 그려졌다. 이는 인물들의 엄격한 절제와 풍부한 힘을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이다.

에피소드

글라라 대성당 앞에는 광장이 있습니다. 순례객들은 이곳에서 아시시 전경을 감상합니다. 광장 가운데 위치한 분수에서 연인들이 앉아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두운 성당 내부보다 연중 내내 햇살이 퍼지는 광장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의 우정을 생각하면 섹스피어의 ‘줄리엣과 로미오’ 사랑 이야기보다도 강렬한 그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분 성인성녀의 우정은 이 세상에서 시작하여 천상 세계까지 이어지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영적인 것인가요.

두 사람의 관계를 묵상하다보면 여자인 나는 드러남과 숨겨짐의 팽팽한 긴장을 그 속에서 봅니다. ‘가난과 평화의 사도’로 그 오랜 세월 교회 안팎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그 빛에 가려 종종 성인의 동반자이기보다는 추종자로 남아 있는 글라라 성녀. 어쩌면 인류역사상 여남 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 두 분 성인성녀에게서도 나타난 듯합니다. 창세기 2장 21-23절의 ‘인간 창조’ 설화에 따라 이야기해보자면 - 저는 창세기 1장 27절의 ‘인간 창조’ 설화를 믿습니다.- 하와가 아담으로 인하여 한 여인으로 태어났듯이 아담도 하와를 통해 한 남자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 여정 속에서 이 세상은 남녀사이의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우주의 만물사이의 소통과 평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또 한 가지 마음속에 안타까움이 스며듭니다. 15년 전 로마에서 신학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성녀 체칠리아 공동체’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나보다 김치를 더 먹고 싶어했던 이태리 친구 Lory (로리)가 결혼하여 글라라(Chiara)와 아녜스(Agnese)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로리는 키가 작아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큰 딸이 엄마를 닮았는지 또래에 비해 키가 작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들과 큰 딸의 키를 비교하면서 불행한 날들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비교는 불행의 시작이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는데도 불구하고 로리는 여전히 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딸들 앞에서 ‘딸 키가 작아 자신이 불행하다’고 하는 말이 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저에게는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자식들 앞에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자주 무심코 말하는 어머니들을 볼 때 어머니 오르톨라나(Ortolana)가 떠오릅니다. 그녀는 세 명의 딸 글라라, 아녜스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참으로 건강하게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큰 딸 글라라가 이웃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아한 그 자태가 여동생들과 어머니까지 감동시켜 그녀들을 도 닦는 삶으로 초대했다고 봅니다.

저도 순간 방심한 사이에 이웃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름을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러움, 더 나아가 시기와 질투의 감정으로 진전시키는 내 자신을 반성합니다.

/ 최금자 글, 김용길 사진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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