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1]

▲ <유다와 베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뽑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다.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성경 대목을 보면, 제일 처음에 소개되는 사도는 시몬이다. 그런데 이 시몬을 소개할 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이라고 밝힌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사도는 ‘유다 이스카리옷’인데, 이번에는 “배신자가 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루카 6,14-16). 이 두 인물 소개에서 공통점은 물론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이름까지 지어주신 베드로와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

베드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질없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 특히 교회를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교우들을 생각하면, 다시 진지하게 성찰해야겠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충실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대목은 거의 없다. 있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그러니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대목 정도일 것이다. 마태오 복음(16,17)에서는 베드로를 ‘행복하다’고 칭찬하지만 그것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아예 칭찬하는 기미도 없고 오히려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마르 16,30 참조).

오히려 성경은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과 거리가 멀었는지 보여줌으로써 신앙 공동체에 경고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 대목에서 베드로는 듣기에도 섬뜩한 질책을 듣는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사탄’으로 극명하게 구별하는데, 도대체 베드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예수님께서는 그러셨을까? 예수님을 위한 것뿐인데 말이다.

두 번째로 당신이 수난과 부활을 예고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두 떨어져 나갈 것”(마르 14,27)을 예고하자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고,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르 14,31)고 복음은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때가 되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14,50).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베드로를 예수님과 엮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알지 못하오” 하면서,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시몬, 주님께서 이름까지 지어주신 베드로의 행적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떤가? 베드로와 그다지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하였다면,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유다를 설명할 때, 마르코 복음서(14,10-11)는 그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함으로써 이를 유다 개인의 문제로만 보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

여태까지 수석사제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몄다면, 이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수석사제들을 찾아간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자발적인 배신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말 그대로 ‘횡재’였을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당연히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베드로와 유다, 예수님이 뽑아 ‘사도’라고 부른 그들은 그렇게 완전하게 ‘실패’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뽑아 당신 마음에 두셨던 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에서의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과 철저하게 다른 길을 갔다는 의미에서 사도들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실패’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뽑은 사도들조차도 모두 당신을 버리고 달아나버렸으므로….

그러나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모른다고 부정함으로써 살아남았기에 인간으로서는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유다는 덤으로 수석사제들을 기쁘게 하고 돈까지 얻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실패했고, 제자들은 성공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이며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 하느님의 백성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표지이며 도구라고 고백한다. 마치 시몬을 베드로라고 이름 지어 주신 것처럼.

교회의 안정과 발전과 영광을 모두가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베드로와 유다를 소개하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예수님의 길은 인간의 눈으로는 철저한 실패의 길’이라는 것 아닐까! 그 ‘실패의 길’을 외면하고 ‘성공의 길’을 가려는 (사탄의) 유혹을 복음은 경고하는 것 아닐까!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하느님 백성(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은 두려운 마음으로 자문자답해야 한다. 베드로와 유다를 생각하며 교회의 ‘성공과 실패’를 다시 묻는다. 교회는 성공했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성공한 것일까? 교회를 사랑하든 아니든, 대한민국을 사랑하든 아니든, 모두 다시 물어야겠다.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가는가? 아니면 예수님 당시 제자들, 특히 베드로와 유다의 길을 가고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 교회는 성장하고 팽창하여 곳곳에 없는 곳 없이 교회가 있는데, 어찌하여 하느님 백성,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기쁨과 희망보다 슬픔과 고뇌에 짓눌리고 있는가? 예수님의 실패를 발판으로 교회의 성공을 꾀하려는 것은 아닌가?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사목헌장 1항)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 … 교회는 그 사명을 수행하려면 인간적인 힘이 필요하겠지만,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도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 (교회헌장 8항)

“인간적인 힘”과 “현세의 영광”이라는 성공의 길과, “가난과 박해”, “비움과 버림”의 실패의 길이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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