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4

1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2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3 “여러분은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합니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합니까?) 4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 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습니다.”

5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셨다.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가면서 잊어버리고 빵을 가져가지 못하였다. 6 그런데 예수께서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십시오” 하고 말씀하시자 7 제자들은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하며 수군거렸다. 8 예수께서 그 눈치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빵이 없다고 걱정을 하다니, 여러분은 그렇게도 믿음이 약합니까? 9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남아서 거두어들인 것이 몇 바구니나 되었습니까? 10 그리고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였을 때는 또 몇 바구니나 거두어 들였습니까? 11 그것을 다 잊었습니까? 내가 한 말은 빵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것을 어찌 깨닫지 못합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십시오.” 12 그제야 그들은 예수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것이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태 16,1-12)

첫 번째 표징 요구 이야기(마태 12,38-40)가 다시 소개된다. 마태오에게 같은 이야기를 두 곳에 배치하여 반복하는 버릇이 있다.

서로 어울리는 그룹이 아닌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그리스어 관사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들은 오늘 단락에서만 4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그들끼리는 경쟁관계지만 예수를 상대할 때 그들은 같은 편이다. 악의 세력의 단결력은 일단 인정해야 한다. 악의 세력끼리 뭉치는 힘을 진보는 흔히 얕잡아본다.

3절이 나타나는 성서 사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본도 있다.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3절이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추측한다. 요구되는 표징과 이적을 가리키는데 마태오는 같은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가 행한 이적과는 다른 수준의 무엇을 보여 달라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서 12,38과 달리 그들은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요구했다. 모세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지 표징을 보여 달라고 모세에게 요구했다(탈출 17,2.7).

3절에서 날씨의 표징과 시대의 표징이 대조되어 있다. 지중해 동쪽 연안과 사막 지역을 참고한 날씨 추측의 정확성은 마태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날씨는 맞추면서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씨 맞추기도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시대를 가리키는 단어 카이로스(kairos)를 마태오는 복수 형태로 썼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는 시대의 표징을 한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이미 보여주었다고 마태오는 말하고 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만 가지를 보여주어도 부질없는 일이다.

▲ 란프랑코, <빵을 늘어나게 하시다>

표징 요구 이야기는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여기에 배치한 마태오의 의도가 또한 중요하다. 한편으로 예수의 적대자들과 예수의 갈등이 점점 깊어진다. 그러면서 곧 나타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마태오는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의 드라마는 긴장과 갈등이라는 극적 요소를 외면하지 않았다. 예수는 갈등의 시기에 태어나 갈등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다 갈등 속에서 처형되었다.

5-8절, 빵 이야기에서 우선 예수와 제자들의 소통 부족이 드러난다. 제자들도 예수도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제자들은 자기 식대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예수는 당신 방식대로 말씀하신다. 오늘날 교회 지배층과 예수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평생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사실 예수의 말씀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들도 자기 방식대로 듣고 이해하는 것 같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로부터 예수의 제자들이 식량을 몰래 제공받았느니, 그들과 은밀히 협상하였느니 하는 수준의 추측은 소설 소재로는 매력적이겠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이 약하다’는 표현은 지적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왜 믿음이 약하다고 혼내셨을까. 빵의 이적이라는 예수 활동의 ‘역사’를 그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마태오적 의미에서 믿음이 약한 것이다. 예수의 역사를 잘 모르면서도 믿음이 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많다. 바리사이파는 가난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차별하였다. 사두가이파는 권력자와 연합하여 특혜를 누렸다.

입으로는 예수를 외치지만 행동으로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그리스도교에 수두룩하다. 오늘의 그리스도교에서 누가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누가 사두가이파 사람들일까. 누구나 맞출 질문이어서 묻는 내가 핀잔 받겠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상에 많다. 내 삶에 속한 모든 부분, 즉 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내 몸에 속한 모든 부분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우나 고우나 내 역사요 내 몸이다. 내 역사 밖으로, 내 몸 밖으로 탈출할 방법이 없다. 내가 보듬고 가야 한다.

내 민족과 내 종교의 역사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운 역사도 정직하게 기억해야 한다. 역사만 기억할 것이 아니다. 현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시대의 표징을 읽는 것이다. ‘시대의 표징’이란 단어는 군사정권 시대에 많은 종교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던 단어였다.

“그것을 다 잊었습니까?” 하고 예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하시는 것 같다. 일제식민지도 잊고, 제주 4.3도 잊고, 유신 시대도 잊고, 5.18도 잊었느냐. 예수의 역사도 잊고, 예수의 말씀도 잊었느냐. 우리가 역사를 잊으면 역사가 우리를 잊는다. 역사를 잊으면 현실도 제대로 볼 수 없다. 강정을 보아라, 대한문을 보아라, 밀양을 보아라. 어디 그뿐이랴. 그리스도교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의 아픈 역사를 잊으면 그리스도교의 아픈 현실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갈등에서 저항으로, 저항에서 해방으로 가는 길을 예수는 걸으셨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저항의 길이다. 성서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예수의 길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장 성서적인 신학이 가장 해방적인 신학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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