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관상>, 한재림 감독, 2013년작, 현재 상영 중

 
영화 <관상>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 계유정란을 소재로 삼았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단종을 제거하고 세조가 되는 결말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데 영화는 내내 기대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새로웠다.

아비 된 자의 심정 vs 공감 능력 상실한 욕망

‘아비의 심정’을 가졌는지 여부로 충신의 길과 역모의 길이 나뉘었다. 충신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했고, 반역자는 진즉에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충신의 길은 너무도 힘겨웠고, 역모의 길은 거침이 없었다. 쉬워 보였다.

이제껏 보아왔던 수많은 ‘수양과 김종서의 대결’ 혹은 ‘단종의 비극’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역모의 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고뇌가 없었다. 지략만 있었다. 남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버리면 살생조차 망설임 없는 일종의 유희가 될 수 있었다.

시절이 하 수상할 때,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쪽을 택하고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게 충신이었다. 그런데 생각은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하고 방어하는 쪽에 가깝다보니, 수세에 몰리기 십상이었다. 아무리 많은 이가 몸을 던져 막으려 해도, “파렴치한 살생도 불사”하며 덤비는 자들을 저지하기란 어려웠다. 무모하고 미련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랬다. ‘자식을 돌보는 아비의 심정’만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들을 위하고 조카를 위하려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못 지켰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다. 가진 재주를 다 펼쳤을 뿐 아니라 거의 초능력까지 발휘해가며 갖은 애를 썼지만,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가문의 몰락, ‘호랑이’들의 몰락, 인문정신의 법통이 끊기고 피바람이 부는 자비심의 몰락. 소중한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과정을 보는 고통은 죽음보다 끔찍했다. 눈이 뽑히지 못한 ‘벌’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야 말았던, 조선 제일의 관상쟁이 김내경(송강호 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옥을 보는 거였다. 김내경은 그것을 겪었다. 관상으로 읽었으되 발설하지 말아야 했던 것일까. 보았으되 개입하지 말아야 했던 것일까. 피할 수도 없었겠지만, 뛰어든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초야에 묻혀 붓이나 손질하는 방관자로서 살았다면 이 모든 피바람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아들을 끝까지 돌볼 수 있었을까? 과연?

한 사람의 욕망에 시대 전체가 맞서야 할 때

백윤식의 ‘김종서’는 역대 최고의 생생함을 지녔다. 무장(武將)의 용맹은 몸피와 갑옷에서 나오는 게 아니며, 충정이야말로 지략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판단임을 보여주었다. 시대에 대한 충성도 충성이다. 한 방울의 피 냄새를 맡고 미리 역모의 피바람을 다스려 잠재우려 한 것, 그게 김종서의 소명이었다.

이정재의 ‘수양’은 역대 최고의 살인마였다. 살인을 즐길 줄 아는 진정 나쁜 놈이었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없고 머리만 비상한, 그래서 순리를 거슬러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재주가 신출귀몰한 자였다. 그래야, 조카를 베고 민중을 학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김종서가 살면 수양대군 한 명이 귀양 가는 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혹은 수양대군이 스스로 권력의지를 꺾고 한갓 선비로 살면 모두 평안할 일이었다. 그러나 수양이 살면, 아니 수양의 권력욕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모두 죽어”야 했다. 인구의 상당수가 짚단처럼 베어졌다. 단지 이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야 했다.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아야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조카를 조카라고 여기지 말아야 원하는 것을 ‘얻을’ 것 같은 세상. 정말, 관상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었을까. 시대를 제대로 읽는다 해서, 바람과 파도를 제대로 깨친다 해서, 무얼 더 보태어 할 수 있었으랴.

슬프다 못해 비통한 결말이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파국이다. 그럼에도 민초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호랑이 김종서를 못내 애석해 했으면, ‘만약’이라는 가정이 이렇게 끝도 없이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것일까 헤아려 보게 된다. 역사에 나오는 한명회(김의성 분)와 역사에 나오지 않는 김내경의 필사적인 물밑 대결, 그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괴롭다. 이유는 하나, ‘보았기’ 때문이다.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것을 제 눈으로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찢어지든 육신이 찢어지든, 이미 봐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보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는 파도가 아니라면, 김내경의 말처럼 세상을 보자. 바다가 바람을 만나 어떻게 파도의 높이를 끌어올리는지 한번 지켜볼 일이다. 볼 눈이 있어도, 없어도 부대껴야 할 파고(波高)라면 말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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