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37]

다랑이를 데리고 나가면 마을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워따 마이 컸다.”
“긍게 말이여. 참말로 마이 컸네.”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저렇게 작은 아기를 보고 많이 컸다고 하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리라. 같은 달수 아기들에 비하면 아직도 다랑이는 많이 작은 편이니까. 하지만 다랑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다랑이의 성장을 기적처럼 느낀다.

한편, 기적은 우리 논에도 찾아왔다. 어느덧 황금빛 물결을 이루어 추수할 때가 된 것이다. 밑거름도 없이 땅을 갈지 않고 맨 땅에 모를 심은 터라(그것도 아주 비리비리해 보이는 모를) 마을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찼었는데 생각보다 나락이 잘 됐다. 우리 신랑이 여름 내 풀 매느라, 웃거름(구정물) 실어 나르느라 애 쓰는 걸 보고 하늘에서 ‘아이고, 저렇게 딱한 사람이 있나’ 하고 굽어 살펴주신 걸까. 아무튼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만 바라보았더니 하늘은 놀라운 기적을 펼쳐 보이신다.

그동안 다랑이를 데리고 나들이 삼아 논에 다니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꼭 다랑이 자라는 만큼씩 모가 자라는 것이다. 다른 논에 있는 벼들은 푸르기도 더 푸르고 키도 잘 크고 포기도 마구 굵어지는데 우리 논에 있는 벼들은 왜 그리도 연약하고 왜 그리도 더디 자라는지…. 볼 때마다 안쓰럽고 눈물겨웠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뿐이라 다랑이를 꼭 끌어안고 논둑길을 걸으며 속삭이듯 쉬지 않고 기도를 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빛으로 인도하소서.” 당연히 그 기도는 다랑이와 벼, 둘 다를 향한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는데 다랑이도 벼도 눈부시게 쑥쑥 자라 주었다. 그리하여 벼 베던 날 특별한 손님들까지 모셨다. 이른바 벼농사 원정대. 얼마 되지도 않는 농사에 일꾼들을 초빙한다니 우습지만, 보성과 장흥에 사는 두 부부가 추수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며 먼저 청해왔던 것이다.

전 같았으면 우리 신랑은 괜찮다며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을 것이다. 워낙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이라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일로 흔쾌히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들을 위해 몇 주 전에 벌써 막걸리도 담가 놓고, 논이 마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벼 벨 때 수고로울까봐 논 말린다고 애를 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수렁논의 물을 다 빼기는 쉽지 않아서 결국 장화를 신고 들어가 벼를 베야 했다.)

▲ “야호, 내년에도 쌀밥 먹을 수 있겠다!” 마당에 널린 나락 앞에서 다울이가 수줍게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정청라

때마침 친정 엄마가 오셔서 일꾼들을 위한 밥상을 차려주시기로 했다. 게다가 홍시에 밤에 땅콩에 먹을거리가 지천인 때라 새참 걱정도 없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기획하지 않았는데도 얼떨결에 추수하는 날이 잔치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약속한 날이 되어 손님들이 찾아오고, 신랑은 일꾼들을 이끌고 논으로 갔다. 혼자서 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가 여럿이 우르르 일하러 가는 느낌은 어땠을까?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신랑 얼굴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표현은 잘 안 해도 도움 주러 온 이들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친정 엄마를 도와 밥상을 준비했다. 워낙에 음식 솜씨가 좋은 친정 엄마는 고구마줄기로 김치를 담고 애호박을 볶고 하며 순식간에 맛있는 음식들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고기반찬이 없다며 걱정을 하시기에 오늘 온 손님들은 다들 고기를 안 먹는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신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희한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였다이.”

가마솥에 지은 밥에 뜸이 맛있게 들어갈 즈음, 일꾼들이 돌아왔다. 각자 자기 밥그릇, 숟가락까지 들고 온 일꾼들에게 밥을 수북이 담아 주고 모두 둘러앉아 밥을 나누었다. 매콤한 음식이 많아서 모두들 코를 훌쩍이면서도 맛나게들 먹어 주었다. 덕분에 밥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지 않고 그릇이 깨끗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친청 엄마가 깜짝 놀랐는가보다.

“밥을 진짜 맛나게들 먹는다이. 진짜 놀라블었네. 어떻게 밥풀 하나도 안 남기냐.”
“밥 한 톨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그런 사람들이니까 자청해서 먼 데까지 벼 베러 와준 거 아니겠어?”

내 말에 친정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렇게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부른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벼 베기를 마쳤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의 도움이 어우러져 벌어진 추수 잔치! 나는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야호, 내년에도 쌀밥 먹을 수 있겠다. 크크.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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