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읽는 헌법 - 마지막 회]

다시, 슬이에게

‘교과서는 왜 반말로 쓰여 있을까?’ 슬아, 혹시 이런 생각 안 해봤니? ‘아니, 뭘 가르치려면 공손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반말을 하고 있지?’

생각해 보면, 교과서에서 꼬박꼬박 존댓말로 서술하는 것이 번잡스럽기도 하고 간결한 문장이 더욱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 그렇겠거니,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오빠는 못내 교과서가 ‘건방지게’ 반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반항심이 생기곤 했단다. 그저 십대의 치기 때문이었을까?

돌아보면, 그것은 교과서 문체 자체의 문제였다기보다는 학교라는 억압적인 공간과 억압적인 입시 교육 시스템 안에서, 억압적으로 지식을 주입 받고 있다는 데 대한 반항심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도 많았지. 예컨대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교과서 내용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 우선, 오빠는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그 실체가 존재 불가능한 허구의 개념이라고 생각해. 나아가 단군신화를 살펴보면, 조선시대까지 단군신화가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었던 것은 맞지만, 신분이 엄존하던 전근대사회에서 민족 구성원 모두가 한 핏줄이라는 주장 자체가 일반화될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에서도 단군은 국조(國祖), 곧 옛 군왕들의 시조로만 간주되었거든. ‘단일민족 한국인’이라는 개념은 특히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시기에 성립된 개념인데, 이제는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교과서는 청소년들을 ‘지식은 있되 생각은 없는’ 바보로 만들려고 쓰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배우는 사람들이 질문을 마음껏 던지기 어렵도록 일부러 억압적이고 딱딱한 반말로 교과서를 쓴 것은 아닐까? 이것은 청소년들을 고분고분한 ‘학생’으로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음모’가 아닐까? 이런 의문을 가졌던 거야.

이런 의문이 일견 우스워 보인다는 것을 알지만, 실은 지금까지도 10년 넘게 이 의문들을 갖고 있어. 법대에 들어와 공부하게 되면서 접한 법률 문장들은 그런 ‘의심’을 이어가도록 하기에 충분했지. 그나마 법리적인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소위 ‘천성산 사건’에 대한 판결문 가운데 일부분을 볼까?

“위 신청인들의 주장과 같이 여전히 활성 단층과 관련하여 공사의 안전성 및 지하수 유출 가능성, 무제치늪과 화엄늪 기타 천성산 일원의 여러 습지들 보호 등의 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피신청인은 위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환경 침해에 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하여 비록 법령상의 환경영향평가절차는 아니지만 사단법인 대한지질공학회에 의뢰하여 자연변화 정밀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조사결과 및 환경부의 의뢰로 이루어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등의 검토의견에 의하면 이 사건 터널 공사가 천성산의 환경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된 사정 등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현재로서는 이 사건 터널 공사로 인하여 위 신청인들의 환경이익이 침해될 수 있는 개연성에 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인정된다.” 〔대법원 2006.6.2. 선고, 2004마1148 · 1149(병합)〕

우리말이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법률 용어들과 죽죽 쓰여 있는 판결문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썼다지만 법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전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도록 쓰인 ‘한글’ 문장들. 심지어 공부를 하면서 정확히 같은 사실관계를 근거로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이해하게 되니, 이렇게 권위적인 ‘반말’로 쓰인 법조문과 판결문들을 마주하면서도 강한 반항심이 들게 됐어. 겸손함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이런 법문들은, 법에 무지하고, 법을 두려워해 알려고 들지도 않는 다수의 일반 국민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이라는 것은 기득권익 보호의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과연 기득권만을 보장하는 것일까? 법은 원래부터 억압의 수단으로만 작용했던 것일까? 오빠는 다르게 생각해. 교과서의 많은 지식들도 충실히 습득하면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도 하는 것처럼, 법률 또한 그 어려움 때문에 실망스러운 순간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법은 더욱 쉬운 언어로 쓰여야 하고, 읽는 이들에게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혹은 사회의 약자로서 억압당하기 쉬운 십대 청소년들은, 온전히 그 시절을 잘 누리기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패배에 익숙하고 억압적으로 잘 훈련된’ 성인이 되는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라도 ‘윽박지르지 않는’ 법문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법을 기득권들만 향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우선적으로 너에게, 너의 친구들인 십대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한국 사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존댓말로 읽는 헌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법조문과 판결문, 인용문들을 모두 ‘존댓말’로 고쳐본 것도 그런 이유고.

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청소년기를 막 지나온 선배로서 늘 이런 생각을 해 왔어. 하지만 공부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어떤 일도 시작하지 못했지. 그런데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네. 슬이, 네가 이제 막 청소년기에 접어들게 되었으니까.

슬이 너를 보면, 오빠가 학교를 다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인생의 찬란한 시기를 폭력적인 입시 체제의 구조와 그 억압 속에서 보내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이 억압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구조 안의 구성원이 구조적인 억압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거든. 대개 그 억압을 개인화시켜서 받아들이도록 학습 받게 마련이고.

자신들의 권리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억압적인 교과서와 반말하는 법률 문장들만을 갖고 있는 너를 위해, 그리고 너와 마찬가지로 오빠가 사랑하는 모든 청소년들을 위해, 얼마 전 똑같이 그 시기를 지나온 선배로서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바치고 싶다. 그러니까 이 글은, 슬이 너와 그리고 모든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야.

슬아, 그리고 편지를 받은 너희 모두, 당당히 너희들의 권리를 외치는 모습으로 답장 보내 주길 바라.

그리고 사랑해.

2012. 4.
진태 오빠

뱀발 : 이 글의 제목이 왜 ‘다시, 슬이에게’인지, 슬이 너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차진태 (모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재학 중이며,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에서 배동교육(청년교육)을 받은 회원이며, 서울대 가톨릭 기도 모임 ‘피아트(FIAT)’에도 참여한다.

 

* 이번 회로 차진태의 ‘존댓말로 읽는 헌법’ 연재를 마칩니다. 양극화와 무한경쟁의 시대를 사는 청소년들에게 따듯한 존댓말로 헌법과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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