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3

2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예수의 발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벙어리가 말을 하고 곰배팔이가 성해지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소경이 눈을 뜬 것을 군중이 보고 크게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습니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셨다. 33 제자들이 “이런 외딴 곳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하자 34 예수께서 “빵이 몇 개나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뿐입니다” 하니 35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36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38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나 되었다. 39 예수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배를 타고 마가단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 15,29-39)

예수의 치유 행위 요약(29-31)과 빵의 이적(32-38)은 한 단락을 이룬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산은 치유와 빵의 이적을 행하는 장소다. 빵을 먹는 군중은 병자들과 함께 이미 30절에 나타났다. 그래서 빵의 이적에 대한 소개 문장이 따로 없다.

예수가 이스라엘 밖으로 나간 경우(마태 8,28-34; 15,21-28)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외적이다. 예수는 이방인 개인들과 만났지만 이방인 군중과 접촉한 적은 없다. 예수의 치유 이적이 이방인 땅에서도 일어났다는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예레미아스(Jeremias)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산으로 올라가심은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마태 14,23), 또는 복된 선언을 가르치시려 산에 오르는(마태 5,1) 대목을 떠오르게 한다. 산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곳(마태 14,23; 17,1), 가르치는 장소(마태 5,1; 24,3)이기도 하다. 30절에서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갈릴래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로서 활동하는 예수의 모습이 펼쳐지는 땅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집단적 치유 행위가 여기서 소개된다.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불쌍한 군중이 다가온다. 병자에게 너그럽게 향하는 예수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갖출 조건이다(마태 11,5; 이사 35,5-). 유다 지배층과의 긴장, 그러나 군중과의 친밀감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데려다 놓은 환자들의 순서와 치유된 순서가 같지 않다. 나열된 환자들의 순서가 성서 사본마다 조금씩 다르다. 치유된 후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한 군중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다(1열왕 1,48; 8,15; 1역대 4,10).

▲ 란프랑코, <빵을 늘어나게 하시다>

빵의 이적 이야기를 마태오가 두 번이나 소개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수의 측은지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8,1-10을 마태오는 약간 고쳤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군중의 배고픔을 알린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먼저 백성의 배고픔을 걱정한다. 군중의 배고픈 처지에 제자들은 여전히 무감각하다. 우리 시대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잘 아는가.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지만, 목사나 신부가 굶어죽었다는 뉴스는 아직 없었다. 집안에서 신부, 목사가 나오면 그 집안은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는 남미의 사례가 떠오른다. 종교인 가족들이 교회기관에 특혜로 취직되는 모양이었다. 재벌급 목사도 있고, 노숙자급 목사도 있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 안타깝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에 남몰래 대리운전을 하는 목사들 처지를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신부들이 좀 생각하면 어떨까.

마르코 복음서 8,10에 기록된 ‘달마누타’가 어디인지 알기 어렵듯, 39절의 ‘마가단’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많은 성서 사본들은 갈릴래아 서쪽 호숫가에 위치한 ‘막달라’로 추측한다. 여호수아기 15,37은 막달라를 가리키는 통속적 이름을 마가단이라 암시하는 것 같다.

오늘 단락의 빵 이적은 성서학자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많은 성서주석서에서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간혹 다루어질 경우 성찬 전례(성례전)와 연결되어 영성적 가치가 강조될 뿐, 백성들의 배고픔이라는 본래의 주제는 잊혀졌다. 빵의 이적이 재빨리 성체와 연결되어 해설되는 경향은 성서를 성직자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빵의 이적 이야기에서 실제적인 배고픔의 문제를 더 주목할 것이다.

성서를 성직자의 눈으로 보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성서에서 메시지를 이끌어내기 전에, 먼저 그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는 일차적이고, 메시지는 이차적이다. 그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된다. 성서에 등장하는 ‘역사’를 재빨리 ‘영성(靈性)’으로 바꾸는 버릇이 성직자들에게 흔하다. 우선 역사를 충분히 주목한 다음, 그 영성적 메시지를 차분히 살피는 것이 적절하다.

빵의 이적 이야기가 두 번 등장하고, 그 두 이야기 사이의 차이를 살피느라 성서학자들은 군중의 배고픔 문제를 주목하지 못했다. 오늘의 성서신학을 주도하는 나라는 여전히 독일이다. 성서학자 대부분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반대로 남미에는 성서학자가 크게 모자란다.

만일 성서학자가 정치, 경제 문제에 민감하지 않다면 그 삶의 자리가 성서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이 삶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삶이 생각을 결정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생각과 삶의 관계는 신학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고 그 마음에 공감하고 그 시각을 같이 하는 신학자가 늘어나면 참 좋겠다.

신학자는 우선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가난한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다. 신학자도 자기가 누구를 편드는지, 무슨 목적으로 신학을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그의 말과 글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 신학자가 교회에서 출세주의에 빠지면 큰일이다.

병자에 대한 예수의 애틋한 마음을 따르려 가톨릭교회는 많은 병원을 세우고 소유하고 있다. 그 병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본래 목적에 걸맞게 운영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교회의 재산 증식과 이미지 관리에 병원과 학교보다 더 좋은 아이템은 사실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잘 따르지 않는 것 같다. 빵의 이적 이야기에서 자꾸 성체를 강조할 뿐,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 문제는 회피하는 것 같다. 교회에 돈이 늘어날수록 교회의 품위와 신뢰도는 추락하게 된다. 오늘의 교회에 돈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걱정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