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2

2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26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이여! 참으로 당신의 믿음이 장합니다. 당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 15,21-28)

여인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는 병 고침 이야기지만, 여인의 어머니와 예수의 대화가 더 강조되는 단락이다. 이방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 초대교회의 이방인 선교라는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아픈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 앞에 무릎 꿇은 용기 있는 이방인 여인이 등장한다. 세상의 어떤 어머니가 그러지 않으리오. 딸이 ‘세계 최고의 테러리스트’임을 모르는 아빠도 세상에 없다.

예수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대화가 특이하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7,24-30을 마태오는 여러 곳에서 고쳤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티로(마르 7,24)만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서에서 시돈을 덧붙였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즉 그리스 여인으로 나오는데(마르 7,26) 마태오 복음서에서 가나안 여인으로 나타난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마르 7,27)는 부분을 마태오는 삭제하였다. 28절에서 여인의 믿음을 마태오가 강조한 것도 마르코와 다르다.

티로와 시돈은 그리스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중해 근처 동네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곳 사람들이 유다인을 나쁘게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곳은 하느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은 곳으로 자주 나타난다(이사 23,1-; 예레 25,22). 예언자 엘리야가 사렙타의 과부를 만난 곳도 그곳이다(1열왕 17,7-).

‘가나안 여인’이란 표현은 그녀가 이방인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적 이야기가 나올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님”(마태 8,2; 9,13; 24,16), “다윗의 자손”(마태 20,32)―두 호칭으로 그 여인은 예수를 부른다.

자신이 왜 세상에 보내졌는지 여기서 예수는 설명한다(마태 10,40; 21,37). 마태오는 유다인 선교를 우선 강조하고, 마르코는 이방인 선교를 우선 강조한다. 마태오는 유다인 입장에서, 마르코는 이방인 입장에서 예수를 주로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서마다 그 강조점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 <가나안 여자>, 랭브르 형제 작품 세부

오늘의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4절로 두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예수는 메시아이다. 둘째, 역사의 예수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해 보내졌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이다(이사 53,6; 미카 2,12). “자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아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당시의 비유다. ‘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을 가리킬 때 쓰던 욕설 중 하나다(1사무 24,15; 2열왕 8,13)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Am ha-arez) 정도의 모욕적인 욕설이다. 사람을 비난하는 비유에서 자주 쓰이는 동물이 불쌍하다. 사람 탓에 죄 없는 동물이 무시당한다. 욕을 하면 쌓인 응어리는 풀리겠지만, 동시에 자신의 품위도 그만큼 추락한다.

오늘 단락의 가나안 여인에게서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무릎을 꿇는 겸손’을, 개신교는 예수께 ‘매달리는 믿음’을 주로 강조하여 왔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하느님의 역사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선의의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활동이 하느님의 역사 안에 포함된다.

둘째, 그리스도교 안에서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강조해야 하겠다. ‘겸손과 믿음’이라는 순종적인 자세는 강조되고, ‘저항하고 요구하는 모습’은 묵살되는 그리스도교의 분위기가 안타깝다. 순종, 복종이란 단어는 그리스도교에서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순종과 복종’보다 ‘자유와 해방’이란 단어가 예수에게 더 잘 어울린다.

신앙생활에 가장 방해되는 욕심 중 하나는 ‘내게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욕심 탓에 ‘나주 성모 발현지’라고 잘못 불리는 곳을 쫓아다니고, 루르드의 성수라고 마시고, 무슨 부적 같은 것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다. ‘내게 왜 오상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을까, 누구는 방언을 한다던데’ 등 남몰래 열등감에 시달리는 신자들도 있나 보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기적보다 예수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오늘의 단락은 잘 보여준다. 예수와 대화하고 질문하고 논쟁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예수를 만나면 나는 무슨 질문을 할 것인가.

무협지 표현으로 ‘삼합’을 겨룬 뒤 예수는 논쟁에서 졌다. 논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상대의 좋은 의견은 어서 받아들이고 나의 근거 없는 주장은 흔쾌히 단념하는 것이다.

여인의 속을 태우지 말고 처음부터 깔끔하게 간청을 들어주지, 예수는 왜 그랬을까. 예수와 여인의 논쟁을 독자들에게 자세히 소개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구원 순서를 설명하려는 마태오의 의도 때문이다. 하느님이 정하신 구원의 순서는 먼저 유다인, 후에 이방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유다인은 구원에서 제외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된 교육을 받은 탓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은―예수께서 오심과 관계없이― 취소되지 않는다.

빵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 이야기를 읽는 현대인 대부분 모욕감을 느끼리라. 유다인은 세계 인구의 1%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99%는 강아지라는 말인가. 유다인을 멸시하는 흐름도 잘못이지만, 유다인을 영웅시하는 분위기도 역시 잘못이다. 성서에는 과장법이 자주 쓰이므로 우리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자. 비유는 본의 아니게 엉뚱한 피해자를 낳기도 한다. 삼천포 시민들을 생각해보자.

이방인 여인의 간청을 묵살하는 제자들의 처신에서 성당, 교회에 다니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여성의 하소연을 방해하는 제자들의 태도에서 여성신학의 주장을 묵살하는 교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자들의 그릇이 어찌 예수의 그릇과 같겠는가. 제자들이 예수를 돋보이게 하기보다 예수를 욕되게 하는 경우도 많다.

어디 예수 당시 제자들만 그랬을까. 예수를 전하느라 평생을 바쳤다는 사람이 사실 예수를 평생 욕보이고 다닌 경우도 적지 않다. 평생 얼마나 많은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노라 자랑하는 신부는 자기 탓에 얼마나 많은 신자가 냉담하게 됐는지 반성이나 할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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