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한상봉]

10월 26일은 어떤 이에게는 절망이었지만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에게는 가슴 먹먹한 해방의 날이었지만, 군사정권은 그들의 희망과 기대를 삼켜버리고, 오히려 광주에서 한꺼번에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자신들의 절망을 넘어섰다.

군사정권은 우리의 뼈에 자신의 DNA를 각인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의 권력의지는 정치공작을 통한 정보정치였다. 한때 실기(失氣)한 적이 있었지만, 박정희의 ‘잘 살아보세’는 박근혜의 ‘국민행복시대’로 계승되었다. 새마을운동이 다시 주목받고, 예전의 공작전문가들이 다소 오랜 휴가를 마치고 청와대와 정보기관과 정치권에 복귀했다.

▲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사진 출처 / 파이낸셜뉴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면서, 지난 8월에 후임 이사장이 된 손병두(요한 보스코)가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34주기 추도식에서 한 말이다. 손병두 이사장은 박정희를 ‘각하’라 불렀다. 그는 국정원 등 국가기관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사건에 대한 항의를 이석기 통진당 의원과 엮어서 “최근 국가반란 음모를 꾸민 종북좌파 세력이 적발됐는데 이들을 척결하려는 공권력의 집행을 두고 유신 회귀니 하는 시대착오적 망발이 나온다”고 말했다.

손병두 이사장은 ‘유신정권’을 범죄시하는 듯한 발언 자체를 불경죄처럼 다룬다. 그는 “아직도 5.16과 유신을 폄훼하는 소리에 ‘각하’의 심기가 불편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태산 같은 각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라며 한껏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오늘은 당신의 따님 박근혜 대통령 정부 아래서 마음껏 당신을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니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고 사무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마저 맹세했다.

손병두 이사장은 오랫동안 삼성그룹에서 일한 ‘삼성맨’이다. 2009년부터 삼성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손병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2004년부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이었고, 2005년부터 서강대 총장을 지냈다. 총장 시절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을 지내면서 사립학교법 개정과 교수노조 입법에 적극 반대했던 인물이다. 권력과 재벌의 주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손병두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국가의 몰락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부터 온다”며 종북 세력 척결을 위한 교육, 문화, 언론, 사법부 바로 세우기 운동을 주장하며 지난 8월 19일에 창립한 ‘대한민국애국시민연합’의 고문 및 자문위원에도 손병두 이사장은 참여했다. 이들은 출범 선언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루어 오는 등 단군 이래 최고의 국운 융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반(反)대한민국 종북 세력의 발호가 심각한 수준에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전교조는 청소년들에 대한 친북 반국가적 교육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풍요를 마음껏 누리면서도 반(反) 대한민국적이 되는 젊은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며 규탄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손병두 이사장이 ‘정의구현사제단, 종북 세력 척결을 위한 가톨릭 신자 정화운동’을 표방한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들은 지난 9월 9일자 <조선일보> 등에 게재한 광고를 통해 국정원의 대선 불법 개입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와 수녀들에 대해 “종북세력에 대한 견제가 절실한 시기에 ‘국정원 무력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며, 이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이 모임에는 가톨릭 뉴라이트 상임의장 김현욱뿐 아니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환경부장관을 지낸 김중위와 박관용, 정종휴 등이 참여했다.

손병두 이사장은 2010년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담화문을 채택하고, 전국의 사제들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가운데, “결과를 보고 판단하자”는 정진석 추기경에 동조하는 이들이 2011년 1월 ‘천주교 나라사랑 기도회’를 열었을 때도 동조하고 나섰다. 이들은 신문 광고를 통해 “좌경 정치사제들이 점조직을 통해 교회에 깊이 파고들었으며, 가톨릭 신학교와 수녀원 등을 통해 의식화된 사제와 수녀들을 양성, 관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교회에서 축출하고, ‘철없이 추종하는 수녀들’을 계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와 교회를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들에게 ‘사회적 사랑’을 강조하는 ‘사회교리’는 복음서의 ‘마리아의 노래’만큼 불온한 문서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가장 정치적인 인물들이면서, 그들은 교회의 사회적 참여를 불편하게 여기고, 교회를 정치적 진공상태로 포장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교계질서 확립 차원에서 정진석 추기경을 옹호하고 나선 적이 있지만,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밀양 사태에 적극 호응하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거부한다. 결국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상관없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손병두 이사장을 비롯한 가톨릭 우익세력이다.

이들이 표방하는 신앙 역시 복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담겨 있다. 한때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던 손병두 이사장의 입장이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과 대동소이한 것은 슬픔이며 분노를 자아낸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나들목교회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34주기 추모 예배에서 김영진 목사는 “하나님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에 큰 축복을 내려 준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무조건 순종하라며 독재했다. 우리나라도 독재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박원영 목사는 복음서를 들먹이며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고, 눈먼 자를 해방시키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라는 말씀은 새마을 운동의 기본 정신인 근면, 성실, 협동, 자주, 국방의 기초가 되어서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가정이나 교회나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행복”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종일 일해도 피곤치 않을 정도로 ‘우리 한번 잘 살아보자’고 희망을 주신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박정희가 우상이 되다시피 한 이 발언들 속에서, 손병두 이사장이 ‘각하’라고 부른 사람과 현직 대통령이 된 그 딸에 대한 사무치는 정이 느껴진다.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니 동일시하고 싶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의 입장과 같을 수 있겠는가.

이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사랑했던 영화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La Strada)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교황은 “이 영화가 프란치스코 성인을 함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재산과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가난을 다행으로 여겼던 자유인이다. 교황은 아마 같은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엾은 이들에 대한 깊고 따뜻한 시선을 가진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길>을 좋아하고, ‘누가 이들을 위해 울어줄 것인지’ 묻는 교황 역시 낯선 얼굴일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회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 언제나 당당한 상류층으로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키에르케고르가 경멸했던 ‘늙고 점잖은 신사’가 제격이다. 너절하게 강정 해군기지 현장에서 채신없이 굴지 않아도 좋고, 길바닥에서 성체를 분배하지 않아도 좋은 기품 있는 교회가 그네들이 생각하는 교회다. 그러니 이들은 “밖으로 나가라”는 교황에게도 ‘나서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싶을지 모른다.

군사정권과 재벌의 나팔수들이 다투어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예수의 슬픈 뒷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자칭 애국 그리스도인’들이 박정희의 화신을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에서 찾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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