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0

34 그들이 바다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35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 부근 지방에 두루 사람을 보내어 온갖 병자들을 다 데려 왔다. 36 그리고 그들은 병자들이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만진 사람은 모두 깨끗이 나았다. (마태 14,34-36)

▲ <카파르나움의 나병 환자가 치유되다>, 제임스 티소, 1894년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6,53-56을 마태오는 크게 줄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제자들이 고백한 후, 예수의 활동에 대한 설명은 중단 없이 계속된다.

겐네사렛이란 곳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막달라 동네에서 북쪽으로 카파르나움과 티베리아스 사이, 갈릴래아 호수 서쪽 근처에 있는 비옥한 평야를 가리키는 것 같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지방의 비옥함을 찬탄하는 글을 남겼다. 그동안 카파르나움과 북쪽 마을인 코라진, 벳사이다에서 활동한 예수는 점차 남쪽으로 향한다.

예수는 이미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마태 4,24). 35절에서 병자를 데려오게 한 그곳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안드레스(andres)로 나타난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andres)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마태 14,21). 이 단어는 오직 남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다.

마태오는 왜 남자들만 언급했을까. 정말 남자들만 환자를 예수에게 데려왔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마태오 복음서 14,21과 연결하다 보니 마태오가 그 단어를 쓴 것 같다. 예수가 여자 환자들을 많이 치유한 사실, 그리고 예수 곁에 있는 여자 제자들의 지위를 마태오가 제대로 주목하거나 존중한 것 같지는 않다.

2천 년 전 살았던 성서 저자들이 여성의 지위에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들도 역시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살았고, 그들 자신도 남성우월주의자였다. 지금 대부분의 목사, 신부들이 그렇듯 말이다. 지난 그리스도교 역사는 남성 위주, 성직자 위주로 운영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역사는 미래에도 지켜나가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 아니라 빨리 고쳐야 할 개혁 대상이다. 지금도 여성 신자들은 교회와 성당에서 들러리 신세에 불과하다. 남성 성직자들이 여성 신자를 홀대하는 광경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오늘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네 부류의 청취자를 의식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여성, 지식인, 이웃 종교인 말이다. 설교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네 부류의 청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먼저 고심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설교자는 네 번이나 자기 논리를 스스로 검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전문용어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는 이미 알려진 분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밀려든 환자들은 하혈하는 여인이 하던 것처럼(마태 9,20-) 예수의 옷을 만진다. 예수의 옷을 만지면 치유의 힘이 생긴다는 구절(마태 9,20-)이 연상된다. 예수의 옷에 달린 옷 술(Quasten)은 예수를 경건한 유다인으로 묘사한다. 하얗고 푸른 색실로 만들어진 옷 술은 계명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이다(신명 22,12; 민수 15,38-). 환자들은 예수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치유 보도는 몇 가지 생각거리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첫째, 유다교 지배층이 점점 더 예수를 미워하게 된다. 예루살렘 시내가 아니라 갈릴래아 시골에서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니는 예수를 그들이 좋아할 리 없다.

둘째,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밀려든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세상의 모든 환자를 예수가 고쳐준 것은 아니다. 예수가 오셨지만 세상의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셋째, 예수는 자기 백성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죄의 주제는 바울에게 핵심 주제이지만, 예수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더 큰 주제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예수에게 돋보인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마음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 측은지심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 자신을 바꿀 수는 있다.

예수를 따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역사의 희생자를 위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교회나 성당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보험에 가입했다고 비유한다면 그 보험을 타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는 들어설 곳이 없다. 구원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하다.

예수, 베드로, 바울, 그 누구도 복음을 전하면서 하루도 호사를 누린 적 없었다. 예수를 전한다는 구실로 온갖 호사를 누리는 일부 종교인들은 정신 차리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그들이 안다면 감히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제대로 전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예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