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신학]

 

성탄 전날 땅거미가 지자, 성당은 왁자지껄 시장판으로 변했다. 내가 다니는 본당의 식구들이 한데 모여 예수 탄생을 축하하려고 잔치를 벌이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성당 안 제대 위에서 천사처럼 꾸민 초등생의 율동과 난타공연, 중고생의 연극, 청년들의 뮤지컬, 지역별로 나뉜 어른들의 성가대회. 

모두가 3시간쯤 연이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며 다들 자신이 나갈 차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잔치를 마치자 기나긴 구유예절과 미사가 이어졌다. 미사 중에 성가대의 긴 특별성가가 이어지고, 나를 비롯한 신자들은 또 벌을 서듯이 묵묵히 듣는다. 그렇게 성탄의 밤은 곤하게 깊어가고, 아기 예수는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왔다. 예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한 지 어언 2000년이 훌쩍 지났건만, 여전히 예수는 매년 아기로 태어난다. 아기는 어린이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처럼 인간과 똑같이 말이다.

나는 예수가 틀림없는 한 인간이었으며, 이 세상의 뭇 사람처럼 살았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신학에 빠져들었다. 물론 가톨릭교회 교리는 예수가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예수가 온전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렇지만 공관복음서를 전공한 교수님께 집중해서 예수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배웠고 내가 신이 아닌 터에, 예수의 신성에 대해 가타부타 할 말이란 없다.

신학이라는 말이 신에 대해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도대체 내가 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참된 기도를 통해 깊은 영성에 들어서면 예수처럼 나 같은 사람도 신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영성신비가들은 가르쳐 왔다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거나 하느님을 잉태한다는 말이 가슴으로든 머리로든 영 와 닿지가 않는다. 이렇게 내 신앙이란 보잘 것이 없다.

예수의 신성보다 인성에서 내 신앙의 길을 찾아보려는 태도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와 함께 예수가 복음서에서 보여준 관계 맺기에 심취하게 만든다. 만일 예수가 보통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하느님 아들이고 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부활했다면, 그가 품은 매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도대체 신이어서 가능했던 예수를 모지란 내가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등을 돌렸을 게 뻔하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함께 신학수업을 들은 학생 몇몇은 나와는 사뭇 다른 예수를 믿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이라는 점보다는 신이라는 점에 더 기울어져 있었다. 예수는 우리 인간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말에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죄가 없다는 면에서만 예수가 우리와 다를 뿐이라고 교수님이 정정해 주었지만, 예수를 신으로 믿고 있는 그와 예수에게서 인간적 매력을 찾으려는 나는 분명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아기 예수는 자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참으로 잘 헤아리고 실천하며 살다 죽었기 때문에, 기억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원래 신이었던 존재가 아기로 태어나 온전한 사람으로 살았지만, 실상은 신의 아들이라는 때깔을 완벽하게 감추지 못했던 것일까? 예수를 참된 기도와 깊은 영성으로 신인합일에 도달한 모든 영성가의 목표라고 보면 되는 걸까? 더 고민하며 살아볼 일이다.  

유정원/ 가톨릭여성신학회 회원,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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