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제연대 활동가 곽은경 로렌시아

“모든 것이 저에게 축복이었어요.”

‘축복’이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지난 25년여의 국제연대 활동가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입버릇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국제연대 활동가 곽은경 로렌시아. 그가 국제 NGO 팍스 로마나(Pax Romana) 아시아 대표 활동가에서 사무총장이 되기까지의 세월을 담은, 책 한 권을 들고 고국을 찾았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라는 책 제목 아래, ‘로렌스 곽,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25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콜롬비아, 시에라리온, 마다가스카르, 페루, 라이베리아 등 100여 개 국을 돌며 만나고, 살았던 그의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 곽은경 로렌시아. 그는 자유와 사랑, 평화로 온 세상과 만나는 세계인이다. 단단한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하면, 여전히 학창 시절의 동료들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깔깔깔’ 웃는 사람이다. ⓒ정현진 기자

그가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 중의 하나는 ‘가톨릭학생회’와의 인연이었다. 7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할 당시, 그의 학교는 학내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시위 참여로 제적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품었다.

2학년이던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즈음, 군 병력이 대학을 점령했고, 총학생회 학생들과 함께 연행됐다. 일주일쯤 폭행을 당하며 취조를 받고 나왔을 때는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선후배와 친구들은 누구 하나 연락이 되지 않았고, 탱크가 가로막은 학교는 물론,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선배를 통해 가톨릭학생회를 알게 됐다.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그때까지 그에게 신앙은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어느 날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 활동을 하던 선배가 명동성당 미사에 나오라고 했다. 5.18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였다. 그 미사를 통해 그는 신앙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절박하게 묻게 됐다고 말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윤공희 대주교의 고백은 “신앙과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화두가 되어 그의 머리와 가슴을 쳤다.

“나는 이 미사를 드릴 자격이 없는 죄인입니다. 사제, 주교로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주교관 7층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금남로를 내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신앙인이라면 저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두려워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만, 나도 하느님도,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은 기도가 아닌 도피였습니다.” (당시 윤공희 대주교의 말)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일까. 하느님이 원하시면 언제든 그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가톨릭학생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됐다. 그리고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가 준비한 도보 성지순례에 참여한 일이 그에게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

침묵하며, 기도와 성가로 이어지는 하루 10여 시간의 여정이었다. 하루 종일 걷다가, 따라다니던 안기부 직원들이 철수한 밤 10시부터 진짜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피곤함을 무릅쓰고 모여 광주민중항쟁과 부마항쟁 등 시국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순교’의 의미가 다시 읽혔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선택한 죽음과 수난이 사회변혁운동으로 연결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큰 진동이 일었다.

그는 그 사건들을 통해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됐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과 큰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학생회, 신앙과 삶, 약속과 책임에 대한 질문에 도전받은 시간”
팍스 로마나 국제 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 대표로 시작된 유목민의 삶

“막연하게 내 맘속에선 지금 내 안의 벽을 깨지 않으면 다음 세계로 나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의 나의 현실이,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이,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 그저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불도 없이 그저 깜깜한 어둠 속일지라도 그 한걸음을 내디딜 때,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 어떤 것일지라도 주저 없이 나아가야 한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90쪽)

▲ 곽은경 · 백창화 공저,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남해의봄날, 2013). 이 책은 곽은경 씨가 파리로 떠나기 전 직장 동료로 만난 백창화 씨가 함께 썼다. 각기 다른 삶을 사는 두 여성의 우정은 이 책을 조금 더 따뜻하고 빛나게 만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비록 ‘타협’이라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운동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취직했고, 성취감도 얻으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하나의 전환점을 만났다.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가 주교회의에 의해 해체되자 학생들이 주교관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가톨릭학생회 파리 본부 지도신부를 곽은경 씨가 동행하며 도왔다. 이 인연이 마침 공석이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아시아 대표로 추천되는 계기가 됐다.

친구와 부모님의 반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엄혹한 현실과 싸우는 것이 우선이 아니냐는 생각에, 짐을 쌌다가 풀기를 여러 번.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과 씨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고 싶었던 일인 것 같다”는 다른 마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 차원의 답변이었다. 기도 속에서 답을 찾고 싶었고, 이것이 어떤 부름인지 답을 구했다.

“어쩌면 이것이 하느님이 나를 부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세상과 이웃을 너무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주는 것인데, 두려움과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해보겠다고 결정하게 됐죠.”

1987년 10월, 국제 NGO 활동가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고, 25년이 한순간에 지나갔다.

그가 세상과 만나는 방법, 눈높이에 맞춘 질문과 삶을 나누는 우정

곽은경 씨와 함께 활동했던 한 사제는 “네가 사람을 만나고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기적을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 기적의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진심어린 눈물. 30여 년 전 그를 감화시켰던 미사에 대해 말하면서도, 아팠던 순간에 대해 말할 때도, ‘축복’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에도 그의 눈가가 젖었다. 별명이 ‘수도꼭지’라며 멋쩍어 하는 그를 보면서, 참 많은 이들과 함께 울었겠구나, 그가 날아다닌 비행거리 만큼의 눈물을 흘렸겠구나 싶었다.

곽은경 씨는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그 나라 사람들과 똑같이 산다. 다른 한국 사람들은 그런 그를 만나면 안타까워하고, 심지어 원주민들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다. 하지만 그는 같이 살고 나누어야만 ‘진짜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런 삶 속에서 공부를 통해서는 몰랐을 성서 구절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만났다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의 영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지혜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관대하지 않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면서, “이 일로 만나는 이들을 통해 나 자신이 여물어가고 신앙도 겸손해진다”고 고백했다.

▲ 지난 23일 열린 출판 기념 강연회. 험하고 엄혹한 현장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묻자 “분노와 슬픔, 상처와 죽음을 붙잡고 있으면 다음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면서 마음을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해답을 찾지 말고, 다만 질문하라

“세상을 구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답을 찾으려고 애써 노력할 것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나의 역할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컴페션’(compassion, 연민)이다. 이 단어는 지난 25년 세계를 떠도는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 누군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낼 때까지 그 고통을 나누며 그와 함께 한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종교적인 함의가 들어있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189쪽)

인간 사회의 온갖 모순이 점철된 것 같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도 등을 돌아다니면서 만났던 현실은 처음에 그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했다. 활동가들이 무엇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곽은경 씨는 “그들의 조력자로서 적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친 교훈이나 무관심이 아닌, 관심과 사랑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배워가는 과정이 바로 ‘만남’이었으며, 그 ‘만남들’ 안에서 보편적 교회와 공동체, 공동선의 실체를 봤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예수는 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됩니다.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풀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 신앙인, 활동가의 몫이라고 봐요. 모두가 그들의 몫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과격한 변화는 늘 과격한 상처와 후유증, 그리고 또 다른 죄를 낳아요. 변화와 변혁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를 들었다. 그토록 어렵게 새로 태어난 민주주의가 여전히 기대만큼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당시의 변화가 정당했고, 필요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과정,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라며 “한국 사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곽은경 씨는 그의 책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묻자, “나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 나라에 살면서도 알지 못하던 이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갖고, 만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곽은경 로렌시아. 그는 2003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해 ‘로렌스 곽’이 됐다. 늘 위험한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는 일에 분단국가의 국적은 너무 큰 장애였고, 신변보호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부터 생애 첫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10월 말이면 다시 스위스 인터라켄에 마련한 그의 집으로 돌아간다. 스위스의 어느 산보다 여전히 지리산이 훨씬 좋다는 그는, 스위스의 집에서 ‘불친절한 민박집 아줌마’로 누군가를 맞이하고 만날 것이다. 그리고 허락된 시간이 다하면, 또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를 부르는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날아갈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