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8

1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 왔다.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십시오” 하고 이르셨다. 17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18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 오십시오” 하시고는 19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마태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는 제목이 흔히 붙는 오늘의 단락은 예수의 피신과 사람들의 뒤따름(13절), 병자를 고침(14절), 그리고 오천 명 이상을 먹인 이적(15-21절),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제목을 ‘병과 배고픔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 정도로 바꾸는 것이 더 적절하다. 21절에서 먹은 사람이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이 단락을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이라고 흔히 부르는 버릇은 못마땅하다. 여자와 어린이를 아예 무시하려는가.

오늘의 단락이 생전의 예수에게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부활 이후 초대교회가 꾸며낸 상징적 역사겠다. 생전에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자주 식사한 경험을 초대교회가 떠올린 것 같다. 굶주린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이 또한 오늘 설화의 배경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뚜렷하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6,30-44를 마태오는 여러 곳에서 고쳤다. 마르코에서 예수는 파견 후 복귀한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떠나지만(마르 6,30-),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듣고 피신한다. 군중에 대한 가르침(마르 6,34)을 마태오는 치유로 바꾸었다. “저희가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마르 6,37)라는 제자들의 항의성 질문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삭제되었다. 100명 또는 50명씩 군중이 모여 앉은 모습(마르 6,40)도 사라졌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예수는 다시 복귀한다. 생전의 로메로 대주교는 여러 차례 살해 위협에도 피신하지 않았다. 교황대사의 피신 권유를 그는 뿌리쳤다. 로메로는 자신을 살해할 사람을 용서하겠다는 뜻을 미리 공개적으로 밝혔다.

▲ 란프랑코, <빵을 늘어나게 하시다>

오천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음식을 사 먹을 식당이 근처에 있었는지, 군중은 자기 먹을 식량도 없이 무작정 예수를 따라다녔는지, 예수가 제자들의 식량 사정도 모르는지, 평소에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는지, 군중들이 지참한 식량이 얼마나 되나 알아보았는지, 그런 사실에 대해 마태오는 관심이 없다. 딱딱한 빵과 소금기 있는 말린 물고기가 갈릴래아 사람들의 보통 식사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제자 세 사람이 먹기에도 모자라는 양이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물론 예수도 굶어야 한다. 제자들이 먹기에도 모자라는 양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예수다.

19절에서 예수의 동작은 유다인의 평범한 식사 예절에 해당한다. 남은 음식을 모으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자와 어린이를 언급한 것은 가족적 식사 분위기를 마태오가 강조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등장하지만 오늘의 단락에서는 빵과 물고기가 소재다.

오늘의 단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보인다. 종말론적 식사를 미리 맛보는 이야기, 자유와 독립을 향한 정치적 해방, 서로 나누자는 합리주의적 해석 등이 제안되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의 설화를 성찬 전례(성례전)와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굶주림에 대한 교회의 처신이 오늘 설화의 중심 주제다. 빵의 이적 이야기를 성찬 전례와 연결하는 것은 의미 있지만, 재빨리 성사론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각자 사 먹도록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답변은 ‘배고픔은 각자의 과제요 교회가 응답해야 할 임무가 아니다’는 말처럼 들린다.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말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 같다. 교회 자신이 가난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는 말씀 같다. 교회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가난한 교회’라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자본주의의 탐욕과 잘못된 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올바른 방향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깊숙이 물든 교회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다. 교황이 자본주의를 비판할수록 교황은 가난한 교회를 사람들에게 더 보여주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비판은 가난한 교회라는 부메랑을 교회에 가져온다. 바티칸뿐 아니라 각 지역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지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수억의 수억 배는 더 가지고 있다. 교회는 재산을 늘리는 기술은 알지만 재산을 줄이는 방법은 모르는 것 같다. 교회는 재산을 국가에 뺏긴 일은 있어도 스스로 재산을 줄여본 역사는 없다.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지는 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자기가 먹을 것도 부족하던 예수의 제자들은 그것마저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회의 배려가 늘어날수록 가난한 교회라는 주제는 더 절실하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교회일수록 가난한 교회를 만들기에 더 앞장서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라는 명분에서 엉뚱하게 부자 교회가 생길 수 있다.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기 위한 술책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를 강조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를 내세우면서 동시에 부자 교회가 되어가는 현실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가난한 교회’라는 주제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다. 가난한 교회라는 개념에는 돈뿐만 아니라 권력의 가난도 포함된다. 갈수록 성직자의 권력이 강화되고 있는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들은 돈뿐만 아니라 권력에서도 가난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돈과 권력에 대한 결정권을 성직자들이 장악하는 한 가난한 교회는 아득한 꿈에 불과하다.

교회 조직 운영은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 문제를 언제나 동시에 의식해야 한다. 올바른 길을 걷기에 힘들고 지쳐도 누군가는 그 길을 제시해야 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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