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4]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차갑습니다. 비가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미네소타의 겨울은 길고 지루합니다. 10월 말에 눈이 오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매서운 날씨가 계속되지요. 이제 겨울 채비를 해야지 생각하니, 자주 찾아가지 못해 늘 송구스러운 ‘평화의 집’ (Peace House) 식구들이 떠오릅니다.

미네아폴리스 ‘평화의 집’은 성요셉 수녀회 로즈 수녀님(Sr. Rose Tillemans)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트윈시티 프랭클린 가(街) 근처의 노숙인들을 초대해 매일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종교를 초월한 나눔과 명상, 기도 시간을 갖는 곳이지요.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 작은 공동체를 노숙인들은 “프랭클린의 거실”이라 부른답니다.

이 곳에 오는 노숙인들 대부분은 술과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분들입니다. 시에서 생활보조금이 나오지만, 보통 일주일 내에 모두 소비하고는 끼니를 해결할 곳을 찾아 이곳저곳 헤매다 저녁에는 노숙인 쉼터에서 잠을 청하지요. ‘평화의 집’에 정기 출석을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자제력이 있고 삶과 사람에 대한 실낱같은 신뢰라도 남아 있는 분들입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으면 식사시간에 참여할 수 없는 규정이 있으니, 적어도 하루에 한 두시간 정도는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미네아폴리스의 '평화의 집 ⓒ조민아

이분들이 ‘평화의 집’을 찾는 이유는, 정성스레 마련된 따뜻한 한 끼 밥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대화를 나누어 줄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동사해도 부음을 전할 사람조차 없는 그 엄청난 외로움과 두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또 거리로 나서야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만은 다들 식구처럼 의지하며 이야기들을 나누지요.

언젠가는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된다면 무엇을 할까”라는 주제로 수다판이 벌어졌습니다.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는지 다들 들뜬 목소리로 ‘포부’를 밝힙니다. 식당을 열겠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겠다, 다들 사연 있는 계획들을 꺼내 놓는데, 제 옆에 앉아 있던 갓 서른을 넘겼다는 금발머리 청년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나는 그런 돈이 생기면 멀리 떠나 버릴 거야.” “어디로 가고 싶은데?” 하고 제가 묻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대답합니다. “어디로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그냥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 반대편으로 가서 살고 싶어.”

한때 대학에도 다녔지만 알콜중독에 빠져 학교도 그만두고 가족조차 떠나 거리로 나 앉았다는 그. 젊은 그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기억의 무게가 어렴풋이나마 제게도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만났을, 한때는 사랑했을 수도 있을 어느 누구에게도 그는 지금 다가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노숙인들에게 ‘겸손’(humility)을 권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 즉 “교만, 거만”과 반대말이지요. 더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시는 분들에게 “자신을 낮추라”니, 이 무슨 잔인하고 몹쓸 지식인의 농간입니까. 노숙인들 뿐만이 아니지요,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사회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반적인 의미의 ‘겸손’이란 오히려 해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특히 가부장적 특권에서 배제된 여성들에게 순명(obedience)과 함께 짝을 이루어 강조되어 온 덕이 겸손이기에, 주디스 플라스코(Judith Plaskow)와 같은 여성신학자들은 겸손이 여성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덕이라 하며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겸손이라는 덕을 누구보다도 강조한 그리스도교 초기인 3-4세기에 압바(abba, 아버지)와 암마(amma, 어머니)로 불리던 사막의 남녀 수도승들은 오늘날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겸손을 이해했습니다. 사막의 수도승들에게 겸손은 언제나 관계적인, 그러니까 다른 수도승들과의 관계, 또는 스스로와의 관계를 염두에 둔 단어였습니다. 누군가는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들어갔고, 누군가는 제국과 타협을 이루며 변질되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실망하여 사막으로 들어갔지만, 이들 수도승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것은 지배와 복종을 근간으로 하는 도시의 질서와 차별되는 삶이었습니다.

사막은 삶과 죽음이 간발의 차이로 서로 미끄러지며 공존하는 곳이지요. 그 사막을 찾은 이들은, 삶이라는 절대 절명의 과제만을 직시하며, 그러나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묻고 싶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사막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했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사막, 두려움과 공허함과 외로움이 악령처럼 수시로 엄습해 오는 사막에서 이들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연약함이었지요. 도시를 떠나던 날, ‘나는 세상을 버렸노라’ 크게 떠벌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 은근히 품고 있었던 영웅적인 자아가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그들은 경험합니다.

홀로서기 위해 택한 사막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승인 압바와 암마의 도움이 없이는, 또 동료 수도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사막 수도자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이러한 자각을 얻은 사막의 수도승들이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마음에 품고 실천해야 할 덕이었습니다. 즉, 나의 연약함과 내 이웃의 연약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 생명의 귀중함과 내 이웃의 생명의 귀중함을 차별 없이 인정하며, 서로를 의지해 하느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바로 겸손이었던 것이지요.

사막의 수도승들이 강조했던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 혹은 교만의 반대어가 아닙니다. 겸손은 또 습관적인 자기비하, 다른 이들을 높이기 위해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자신의 필요를 주장할 때 하염없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어쩐지 친숙하게 들리지 않으세요? 바로 교회 여성들의 모습입니다). 겸손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나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상이 오롯이 지켜질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것이지요.

의로운 체하거나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하는 것도 겸손이지만, 왜곡된 자아상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혐오하는 자기 파괴적 회의를 거부하는 것도 겸손입니다. 나아가 내 이웃이 나를 통해 스스로를 비추어 보도록, 나 또한 그렇게 이웃을 통해 나를 비추어 보도록, 서로를 기꺼이 허락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렇게 마주 보아 부끄러워 지지 않도록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이여, 그대가 인간임을 알지어다. 그대의 온전한 겸손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고, 나아가 이웃에게 너그러우며 그들의 어려움을 살필 줄 아는 것이 겸손이라고 말했다지요.

사막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메타포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마른 인간의 사막에, 자본의 칼바람 사이로 아슬아슬 몸을 가누며, 경쟁이라는 포악한 맹수에 쫓겨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한 모금 인간의 정과 도리를 오아시스처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말이죠.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겸손을 수도승들과 성인의 지혜에 기대어 우리시대의 언어로 번역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저는 ‘공감(共感)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느낄 수 있는 힘 말입니다. 마천루들이 즐비한 이 기이한 사막에 사는 나와 당신이, 그래도 인간임을 감지할 수 있는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보듬고, 당신의 안쓰러움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며, 당신이 아플 때 나도 함께 아픈, 힘이라 하기엔 너무 애처롭고 보잘것없지만, 그래서 더 예수의 마음을 닮은 그 힘 말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겸손은 따라서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추구해야 할 덕입니다. 노숙인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하고, 자신의 회복 가능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노숙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바로 오늘, 이웃의 신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이웃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대신 폭압과 독재의 질서를 다시 불러일으키려 하는 그 누군가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조민아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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