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7]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토스카니니(1867-1957)가 1952년도에 NBC 심포니를 이끌고 카네기 홀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지휘하는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가 85세 되던 해였는데도 불구하고, 악보도 없이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은 존경과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텔레비전 생중계 당시의 동영상으로, 조명으로 인한 불빛과 열기 때문에 4악장 마무리 부분에서는 아예 눈을 감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지휘를 할 수밖에 없었던 토스카니니는 이 공연 이후에는 텔레비전 생중계를 위한 무대에는 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첼로 연주자였던 토스카니니는 어떤 악보든 외워서 지휘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완벽주의에 비타협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오케스트라 연습 도중 틀리는 부분이 있으면 정확히 연주할 때까지 몇 번이고 연습을 시킬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열아홉 살 때 브라질에 오케스트라 공연을 갔다가 지휘자가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자, 단원들의 권유로 지휘봉을 잡았을 때 암보를 해서 거침없이 지휘를 함으로써 청중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 이후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로 데뷔했을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리 지휘자의 권위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관행이 많았습니다. 극장계에는 좋지 않은 관습이 많았으며, 흥행주와 대리인, 프리마 돈나, 연주자들도 다루기 힘들었고, 오페라에 있어서도 성악을 제외하면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개성이 강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휘자가 통솔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단원들은 음악 일을 오래 했고 경험도 많았기 때문에 심사가 틀어지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어서, 그 무서움을 경험한 지휘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토스카니니는 이런 그들을 장악해 갔습니다.

지휘자로 데뷔한 이후 토스카니니는 당시의 잘못된 관행들을 하나씩 바로 잡아갔으며, 넘치는 카리스마로 지휘자의 위상을 바로 세웠습니다. 서른 한 살의 나이에 그는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음악감독 겸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분야를 개혁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개혁 내용을 보면 먼저 레퍼토리에 대한 부분을 들 수 있습니다. 레온카발로와 같은 자국 이탈리아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곡가를 비롯해 바그너, 베를리오즈, 드뷔시 등의 외국 작곡가의 작품을 토스카니니는 과감히 무대에 올렸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계에 새로운 작품을 소개한 지휘자도 토스카니니였습니다.

토스카니니는 기존의 오페라 문화도 하나씩 바꾸어 나갔습니다. 관람 중에는 여성들이 모자를 벗도록 했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던 무대의 막도 좌우에서 단번에 여닫을 수 있도록 바꾸었습니다. 오페라의 마지막 부분을 발레로 매듭짓는 관습도 폐지했으며, 공연의 일관된 흐름을 위해 앙코르도 원칙적으로 없앴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예술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이었고, 부분보다는 전체로서의 음악성을 추구했던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의 지휘자로 있을 당시 단원들은 악보를 집에 가져가서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에게 시달렸다고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직선적이며 타협을 몰랐습니다. 극장 측은 총론에서는 그의 천재성과 카리스마를 인정하면서도, 각론에 들어가면 그와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사항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연주 시에는 악보의 지시를 엄격하게 지킬 것과 가수 마음대로 노래 부르지 말 것 등이었고, 청중도 입장 시간을 준수하도록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관람석의 불을 끄게 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도덕예술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점이 극장의 행정가들뿐 아니라 연주가들과 충돌을 일으켰고, 그는 결국 10년간 몸 담았던 라 스칼라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감독과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으며, 바이로이트 음악제와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단원들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툭하면 폭발하는 성미와 거친 욕설 때문에 단원들은 위협을 느꼈지만, 청중들은 그의 공연을 보지 못해 안달이었고, 항상 악보를 외워서 지휘를 했던 그는 컬트(종교적인 숭배 대상) 자체였습니다.

토스카니니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작품에 충실하고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그의 말입니다.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멩겔베르크의 베토벤, 브루노 발터의 베토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베토벤의 베토벤뿐이다.”

토스카니니가 서거한지도 60년이 가까워 오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합니다. 즉 토스카니니는 기본적으로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며, 집요하게 객관성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지휘자였습니다. 그리고 전후의 젊은 세대 음악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토스카니니는 비록 독재적인 스타일을 지녔으나, 20세기 지휘자들 중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 이전에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휘자였습니다.

NBC 방송이 토스카니니를 위해 만들었던 NBC 심포니에서, 그가 70세부터 87세까지 지휘를 하다가, 더 이상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자, NBC 심포니를 해체했다고 할 정도로, 미국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경의를 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지휘자가 지휘하는 동영상을 오늘날 유튜브를 통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에 관한 숱한 일화를 떠올릴 수 있음 또한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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