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6

53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54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55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57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마태 13,53-58)

▲ <성가정>, 무리요(1660)
마태오 복음서 13,1-53에 나오는 예수의 여러 비유 말씀을 마감하는 곳이 곧 53절이다. 53절은 마태오 복음서 19,1과 비슷한 내용이다. 예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사람들은 54절, 56절에서 두 번씩이나 묻고 있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6,1-6에서와 다른 점이 몇 가지 보인다. 제자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의 형제 중 마지막 두 사람의 이름 순서가 바뀌었다. 예수의 능력에 대해 의심받을 수 있는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마르 6,5)를 마태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언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사례에서 유독 친척이 빠져 있다. 복음서 저자마다 같은 내용을 조금씩 바꾸는 모습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태오는 조심스런 편집자다.

54절에서 마태오도 마르코처럼 “고향”이라고 말할 뿐 ‘고향 나자렛’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고향이 나자렛이란 사실은 전제되어 있다. 개역 개정 성경에는 ‘그들의 회당’으로 제대로 번역되었지만, 공동번역에는 아쉽게도 ‘그들의’라는 단어가 빠져 있다.

‘그들의 회당’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공동체와 유다교의 서먹한 거리감을 나타낸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는 모습은 복된 선언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다(마태 7,28).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의심스런 반응을 나타낸다. 지혜는 예수의 설교를 가리키고 능력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언제나 예수의 이적과 관계되는 단어다.

“목수”(tekton)는 나무나 돌로 집이나 도구를 만드는 직업을 가리킨다. 나무가 적었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집은 대개 점토와 돌로 지어졌다. 예수는 나무보다 돌을 더 자주 만지지 않았을까 나는 추측한다.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걸을 때나 돌담을 볼 때, 나는 돌을 만지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한다. “목수”(마르 6,3)에서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바뀐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다인의 방식으로 부친의 직업을 단순히 기록했을 수 있다. 목수를 구세주로 내세우기 멋쩍어서 그럴 수 있다. 방랑설교자로 사는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55절에서 히브리어 표현으로 마리암(Mariam)이 보인다. 동정탄생은 여기서 암시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동정탄생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부를 마태오가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의 예수 이해에서 동정탄생은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형제(adelpos)라는 단어는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척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부모의 핏줄을 같이 하는 친형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작은 동네인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이 예수에게 보인 거리감이 마태오 복음 독자들에게 더욱 충격이다. 57절 예언자 부분에 마태오 공동체의 방랑설교자들이 겪던 경험이 투사된 것 같다. 그들은 생전의 예수가 돌아다니며 가르칠 때 맛본 쓰라린 실패를 떠올렸을 것이다. 제 집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예수에게 큰 부담이 될 말을 감히 마태오가 꾸며냈을 것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성서 해석 역사에서 오늘의 본문은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평생동정교리와 연결되어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친형제를 가리키는지 친척을 가리키는지 성서신학적으로 누구도 100%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지배적인 흐름은 예로니모 이래 예수의 사촌들을 가리킨다는 의견이었다. 그 주장은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19세기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예로니모 이전에도 그리스 교회에서는 요셉의 첫 번째 결혼 때 낳은 자녀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요셉은 재혼한 셈이고 마리아는 후처로 결혼한 셈이겠다. 초대교회 때 테르툴리아노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후에 낳은 자녀라고 주장하였다. 그 의견이 19세기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받아들여져 오늘에 이른다.

대부분 가톨릭 학자들은 놀랄 만한 조심성으로 이 주제에 대해 언급을 피한다. 교회정치적 측면에서 그렇게 처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주제에 대한 언급 탓에 처벌받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그동안 적지 않았다. 소심한 나도 다치기 싫어서 내 의견을 밝히지는 않겠다.

마리아 평생동정교리는 그 의미 깊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성(性)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져왔다. 원죄는 출산을 통하여 전달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잘못된 표현도 성에 대한 오해를 부추겼다. 바울이 그리스 철학 용어를 빌려 영와 육을 구분한 것에서 육이 마치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된 것도 부작용을 낳았다.

그래서 성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덜 거룩한 것으로 오해되었다.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마치 기혼 신자들보다 더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잘못 가르쳐졌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서 이제 얼른 벗어나야 한다. 창조신학 관점에서 보면 성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인간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부족한 사람이다. 성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는 성에 대해 말한 적 전혀 없다.

만일 동정을 의학적 관점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본다면, 예수의 형제, 자매에 대한 논란은 간단히 풀린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성경험 유무에 무관하게― 누구나 신학적으로 동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성경험이 전혀 없더라도― 신학적으로 동정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동정인 매매춘 여성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으로 동정이 아닌 독신자도 있을 수 있다. 성경험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유물론적 시각에 불과하다.

오늘 단락의 주제는 예수의 형제, 자매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느님 말씀이 풍부하게 가르쳐지는 곳에서보다 더 그 말씀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은 없다’는 루터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무의미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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