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신문을 통해 보는 한국 교회 - 1]

김유철 칼럼 ‘교계신문으로 보는 한국 교회’를 열며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나아갈 길을 교계신문의 창에 비친 모습을 통해 바라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교계신문인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관지 형태를 띤 언론매체입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모습이 가감 없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 우려하는 대로 기관지인 탓에 보수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교회언론이 보수적이란 것은 외부에 비춰진 모습과는 달리 한국 교회가 보수적인 사실과도 직결합니다. 한국 교회가 보수적이란 것은 대다수의 천주교인이 보수적이란 것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즉 교계언론을 바꾸고 싶으면 한국 교회의 쇄신과 변화가 필수적이며, 한국 교회가 변화하려면 천주교인의 회심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여, 한 달에 한 번의 연재를 통하여 교계신문에 비추인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야 할 주제들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들의 성원을 바랍니다. ―필자

▲ 평양 장충성당의 제대 ⓒ김유철
10월 30일이면 25주년을 맞이한다. 교회의 관행적 용어로 하자면 은경축이다. 북한의 심장부 평양에 천주교회, 즉 성당이 건립된 지 25년이 되었다. 북한은 1988년 조선천주교인협회(현재 조선카톨릭교협회)를 창립하고 그해 동평양의 선교구역에 장충성당을 지었다. 완공 당시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당시 로마에 머물던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주교)와 정의철 신부가 그해 10월 30일 축성 미사를 장충성당에서 봉헌했다.

장충성당에 대하여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김정신 교수의 설명이다.

“부지 2,000m², 건평 1,852m²로 평양의 옛 선교리인 대동강 동남측 주거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북한 내 유일한 성당이다. 열주에 의한 내부 공간의 분절이 없는 강당형 건물로 250석 규모의 회중석에 제단, 제의실, 성가대석, 고해소, 각종 성화와 성물 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전면 중앙 출입구를 아치탑 형태로 강조하고, 외벽은 매 칸마다 기둥과 아치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세계청년축전(1989년)과 외국인 및 관광객을 위해 건립되었고 교황청과 교계적 일치를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남북 천주교 교류와 북한의 종교정책의 변화를 반영한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북한은 그들의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 사회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말하는 종교의 자유와는 분명 거리가 있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5개 종단을 허용하고 있다〔조선불교도연맹(1945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1946년),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1946년), 조선천주교인협회(1988년), 조선정교위원회(2002년)〕. 그리고 종교시설은 해방 전에 건립된 몇몇 불교 사찰과 함께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동방정교회와 장충성당이 있다.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남북 간 300만 명이 넘게 사망하고 폐허와 서로를 향한 증오만 남긴 동족상잔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을 맞고 있지만,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화해와 일치의 길이다.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북한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리는 미사 성제가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은 위에 말한 장충성당 축성 미사 때가 처음이 아니다. 장충성당 축성 3년 전인 1985년 9월 22일 한국순교성인대축일에 평양의 고려호텔 영화관에서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주례로 미사가 봉헌했다(<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지 주교와 일행들은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했지만 한국순교성인대축일 미사가 북한 땅에서 봉헌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무수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투옥되고 학살당했는데, 이러한 새로운 순교자를 양산한 북한 땅에서 그 전해인 1984년에 시성된 순교성인들의 전구를 체험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8년 북한에 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장충성당이 완공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손길이었다.

▲ <가톨릭신문>, 1985년 9월 29일자 1면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아직 여물지 않은 부리로 사력을 다하여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줄(啐, 떠들 줄)이라 하고, 이때 어미 닭이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바깥에서 부리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啄, 쫄 탁)이라 한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 생명이 온전히 탄생하는 것이다.

북한 땅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고, 성당이 들어서는 것은 북한 당국의 회심 혹은 전시용 사업 이전에 하느님의 손길에 의한 ‘줄탁’으로 읽어내는 것이 신앙인의 눈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과 발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이든 하느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과 같은 도구인 것이다.

사실 북쪽의 움직임 이전에 남쪽에서 하느님 손길에 의한 역사는 태동하고 있었다. 1982년 12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북한선교부(담당 주교 김남수 주교, 선교부장 김몽은 신부)가 출범하였고, 담당 주교인 김남수 주교가 1983년 6월 북한 동포를 향한 특별 메시지 <주께서 함께 계시다>를 발표하였다. 이후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해체에 따라 주교회의 직속기구인 북한선교위원회로 개편하였다. 그런 연후에 북한 땅에서 미사가 봉헌되고, 천주교인협회가 창립되고, 장충성당이 들어선 것이다. 결국 이런 일들은 하느님에 의한 줄탁동시였다.

그 이후에도 일련의 일들은 이어졌다. 1989년 6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가 평양 장충성당에서 남북공동 통일염원 미사를 올렸고, 1989년 10월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기념 심포지엄이 ‘그리스도 관점에서 본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열렸다. 이어 1992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북한 선교 관련 조항 개정과 함께,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개정하였다. 이제 교회는 북한을 ‘침묵의 교회’라는 차원을 넘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여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마침내 남북 신자가 처음으로 함께 모여 통일을 위한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는 데 이른다.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은 모두 1995년 11월 5일자 신문에서 그 사실을 보도했다. 미국의 뉴저지에서 열린 남북 세미나에는 당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장인 최창무 주교와 명동성당 주임 장덕필 신부 등이 참석하였으며, 북측에서는 조선천주교인협회 장재철 중앙위원장과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 등이 참석하였다. 최창무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미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평양의 장충성당 교우와 남한과 해외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고 양측의 만남에 기쁨을 표시했다. 이어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은 “북측 신자들은 미흡하나마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왔다.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통일의 그날까지 함께하기를 기원하자”고 인사했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북한 전역에 천주교인이 3,000여 명, 평양에 800여 명 있으며 장충성당 등록 신자는 200명이라고 전했다. 그해는 남북이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해였으며 남북에게 하느님의 희년은 그렇게 다가왔다.

▲ 미국에서 열린 남북 신자 공동 세미나를 보도한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 1995년 11월 5일자 1면

그러나 남북 천주교인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일부에서 이른바 북한 신자들이 ‘진짜 신자’인지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진실 게임’이 나오게 되었다. 마치 그것은 하느님에 의한 출애굽 이후 히브리인들이 한숨 돌리게 되자 먹을 음식과 마실 물 타령을 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1998년 5월 평양 장충성당을 다녀온 최창무 주교에게 어느 신자가 물었다. “그들이 진짜 신자던가요?” 최 주교는 담담히 “당신은 진짜 신자입니까?”라고 되물었다(<경향잡지> 2005년 6월호, 31쪽). 그러나 불행하게도 ‘진짜 신자’론은 이후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2000년 북한을 방문한 조환길 신부(당시 대구대교구 사무처장, 현 대구대교구장)의 방문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번 방북에서 무엇보다도 귀한 경험은 북한 신자들과 함께 2000년 대희년 첫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었다. 미사에 참례한 130여 명의 북한 신자들도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 사람들은 북한에 다녀온 나에게 그들이 진짜 신자 맞느냐는 질문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그 자신과 하느님만 알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도 누군가에게 세례를 받았고, 지금은 사제가 없어 미사를 드리지 못하지만 공소 예절로 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당에 등록되어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들이며,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노동당원은 될 수 없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진짜 신자들인가?” (‘평양에서의 7박8일’,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70쪽)

2008년 9월 정의구현사제단의 50여 명 사제들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지만 아직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북녘 땅을 방문하고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데 우리의 손과 발이 필요하다. ‘진짜 신자’, ‘가짜 신자’에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의 손길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가는 비가 온몸에 스며들 듯, 그리고 줄탁동시의 기적을 믿으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발걸음은 중단 없이 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는 북한 교회를 복음적 공동체 안에 품어내는 따뜻하고 정성스런 노력을 보여야 하며 북한 사회 체제의 속성을 이해하고, 북한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과 현실 속에 하느님의 섭리로 둥지를 틀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복음적으로 이해하며 수용하는 교회적인 인식과 신앙적 접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짧고도 길었던 25년, 장충성당의 은경축 미사를 위하여 한국 교회는 방북할 용의가 없는가? 평양에도 하느님은 있다.
 

 
 

김유철 (스테파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시인, 창원민예총 대표. 저서 <그대였나요>, <그림자숨소리>,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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