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자 2628호 <가톨릭신문>과 999호 <평화신문>

서강대가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유엔의 승인’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사업단,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유엔과 바티칸 관계자와 국내외 학자 및 국무총리도 참석을 한 것으로 교계신문들은 보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신문>은 2면 상자기사와 4면에 집중보도를 하였고, <평화신문>은 3면 스트레이트 및 8면 특집, 2면 사설에 걸쳐 기사를 다루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유엔의 승인’이란 역사적 사실에 한국천주교회 그리고 장면 씨와 더불어 바티칸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정부수립과 외국의 승인은 당시 막 독립된 나라로서는 아마도 시급한 당면과제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기념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전의 상해임시정부에 대하여 아니 일본제국에 대한 바티칸과 한국천주교회의 입장은 무엇이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추궁이다. 이것을 피해갈 길은 도무지 없다.

‣ 바티칸의 ‘보이지 않는 손’

“일제하 한국교회의 공과에 대한 책임은 한국교회의 통치권자나 선교사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민족과 멀리 살았던 책임을 교회의 통치권자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다. 천주교는 그 구조상 신자는 사제와 주교에게, 사제들은 주교에게, 주교들은 교황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교계적 제도의 종속성으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교회의 통치권자는 교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황청의 한국교회에 가졌던 태도는 한국민족이 겪고 있는 감정과는 달랐다.… 교황청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 또는 신성시한 극단적인 표현은 신사참배를 허용한 일이다. 로마교회는 한 번도 약소민족과 피압박 민족의 편에 서서 고통에 동참한 적이 없다.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1942년 한국인이 교회의 통치권자가 되었어도 과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김진소,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선교방침과 민족의식”, <교회사연구> 제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29-30쪽.)

두 교계신문은 ‘주권국가 승인에 교황청 큰 역할’(가톨릭신문 4면), ‘유엔 대한민국 승인에 가톨릭 기여’(가톨릭신문 2면) ‘한국정부 유엔승인에 바티칸의 손 있었다’(평화신문 8면), ‘교황, 한국 유엔 승인 지원지시’(평화신문 3면)라고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했지만 교황으로 대변되는 바티칸 당국이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상태에 대하여 혹은 임시정부 독립운동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었는지 발굴하여 보도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일은 연관지을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해방 전과 후의 행동이 비슷해야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들의 횡포에 대하여, 약소민족의 고통에 대하여 침묵하고 지배세력에 대해 협조하다가 갑작스런 변신을 일으킨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한 경희대 허동현교수는 “유엔의 승인 그 이면에는 냉전체제 아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가톨릭교회의 지원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라고 발표했다.(가톨릭신문 8면) 윗글에 인용한 김진소 신부가 지적한 대로 바티칸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순수하게 약소민족의 편에 서서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란 말이다.

‣ 한국천주교회의 5년 전 활약

해방 3년 전, 즉 대한민국 정부수립 불과 5년 전인 1943년에 한국천주교회가 한 말을 우리는 기억하는가? 2008년 8월 15일에 발간한 졸저 <깨물지 못한 혀>(우리신학연구소)에 무수히 많은 인용문이 있지만 두 가지만 재방송한다. 지겹지만 할 수 없다.

<국민총력-금속품 헌납 중 일부>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트리고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이런 쾌감은 그 자체만 보아도 우리가 금속품을 남모르게 감추고 비밀히 애지중지하는 그 애착심에 비하여 훨씬 고상하고 깨끗하고 대장부다운 맛이 있는 것이다.(<경향잡지> 957호, 1943년 4월호, 1쪽.)

<국민총력-대망의 징병제 중 일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신이니 황국을 위하는 정신과 내선일체의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가져 실현하기로 힘쓸 것이오, 국어(일본어-인용자 주)를 모르는 청년들은 하루바삐 국어에 달통하도록 힘써 응소된 다음에 여러 가지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내지군인들의 장점을 지금부터라도 배우기를 힘쓸지니 서로 일치단결하는 마음과 자기가 맡은 책임은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수행하고야마는 그 견고한 책임 관념과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실망낙담 하는 일 없이 꾸준히 끝까지 최후의 한 방울 피까지 갈진히 하려는 백전불굴의 정신 등은 황군이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경향잡지> 955호, 1943년 2월호, 1쪽.)

위에서 말하는 <국민총력>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1938년)에서 ‘국민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1939년)으로 재조직된 후 당시 한국천주교회 유일한 잡지였던 <경향잡지>에 게재한 공문 형식의 선전물이다. 과연 한국천주교회는, ‘가톨릭’ 단체는 이 땅의 독립을 원했다는 말인가? 그 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외국에 파견한 교계인물은 있었는가? 유엔승인을 위해 그토록 애를 쓰고 그 와중에 하느님의 손길마저 느꼈다는 장면씨는 불행하게도 친일인명사전 대상자로 선정된 이율배반을 교회인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란 논리를 가지고는 늘 교회의 약점인 ‘순응과 협조’의 모습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정부수립 공헌자 이전에 식민지정부 협력자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던 해에 이국땅에서 시작을 했다. 조국은 지리한 외세에 눌려 숨 막힐 듯한 시절을 보내다가 1945년 8월 15일 우리 자신의 힘은 아니었지만 이 땅은 비로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후 남북은 어이없는 이념으로 한 나라 아닌 분단으로 치닫고 결국 따로따로 정부를 수립하여 이 날까지 등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바티칸과 한국천주교회 그리고 장면씨의 노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헌자 이전에 일제 식민지정부의 협력자였다. 치욕이지만 사실이다.

하느님 은총이 넘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말이 앞선 고백보다는 진정한 참회가 우릴 하느님 앞에 바로 서게 한다. 판공성사 삼 년을 거르면 ‘냉담자’라 부르는 교회다. 교회는 해방 이전의 잘못에 대해 60여 년의 세월동안 몇 번의 성사를 외면하고 있는가? 한국천주교회는 누구인가?
 

김유철/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운영위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