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4

44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45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어떤 상인에 비길 수 있습니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마태 13,44-46)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마태오에게만 전승된 단락으로 하늘나라를 찾은 기쁨에 대한 비유가 나타난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 남자와 여자가 등장했는데, 오늘 보물과 상인의 비유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나온다. 남자 농부와 여자 주부에 이어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와 부유한 상인이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 사이에 끼어 있는 오늘의 단락이 편집상 적절한 자리에 배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다-팔다-사다’라는 형식을 갖춘 보물과 상인의 두 비유는 형식상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다.

둘째 비유에서 진주가 아니라 진주를 찾는 상인이 하늘나라에 비유되는 것이 예상 밖이다. 오늘의 비유는 도마 복음에서 두 군데에 나누어져 있다(109, 76). 유다교의 지혜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비유인 것 같다. 지혜는 보물(잠언 2,4; 8,18-21), 진주(잠언 3,14.15; 8,11; 욥 28,17)로 여겨졌다.

그릇 안에 금화나 은화를 담아 땅속에 묻어두는 것은 전쟁 때나 불안한 시절에 재산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갈릴래아 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자주 입은 곳이다. 재산을 땅속에 숨긴 사람이 묻은 곳을 나중에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속자도 그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정 때문일까. 땅속이나 폐허에서 노다지를 찾거나 농부나 노동자가 자기 땅이나 남의 땅에서 횡재를 발견한다는 기대는 고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첫째 비유에서, 남의 땅에서 발견한 보물은 법적으로 누구의 소유일까. 페르시아 법률에 따르면 그것은 왕이 차지한다. 로마법에서는 이전 소유자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땅을 산 사람이 차지한다.

첫째 비유에서 보물을 찾은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에게 여러 선택 가능성이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는 찾은 보물을 남모르게 차지할 수 있었다. 즉 훔치는 셈이고 그러면 그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하늘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소유뿐 아니라 지금까지 지녔던 윤리조차 포기한다는 크로산(Crossan)의 해설은 어느 면에서 타당하겠다. 그러나 그 노동자의 행위가 비도덕적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하지 않은 셈이 된다. 더구나 진주의 비유에서 상인은 아무런 비도덕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 크로산의 해설을 내가 찬성하기 어려운 이유다.

가난한 노동자는 보물의 원래 임자를 찾아주기 위해 습득물 신고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3의 방법을 택했다. 그 땅을 사서 땅속에 묻힌 보물조차 차지하려는 것이다. 마태오는 그 노동자의 행위에 대한 법적 ·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 보물로 비유된 하늘나라를 찾은 기쁨과 그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는 노동자의 결단에 마태오는 초점을 맞추고 있다.

45절에서 상인(emporos)은 수출도 하고 수입도 하는 부유한 상인을 뜻한다. 진주는 주로 인도에서 수입되었고, 알렉산더 대왕 때부터 유행했으며 보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진주는 유다교에서 아주 값진 것을 가리키는 종교언어로 사용되었다. 진주는 토라〔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공동성서(구약성서) 처음 다섯 책〕, 이스라엘, 적절한 생각, 경건한 자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보상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상인이 진주를 사기 위해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았다는 사실이다. 하늘나라를 위해 재산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오늘 단락의 두 비유는 원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강조되고 해설되었다. 예수는 진주요 땅속에서 찾은 보물이라고 일찍부터 해설되었다. 보물이 땅속에 묻힌 것을 마치 예수의 신성(神性)이 예수 몸속에 감추어진 것처럼 해설되었다. 멋진 연상이지만 성서 본문과 관계없는 해설이다.

보물은 복음 말씀을 가리킨다고 자주 해설되었다. 보물은 진리를 가리킨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고, 개신교 신학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보물과 진주의 비유에서 신자들에게 보내는 강한 경고를 이끌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해설에 자주 인용되는 성서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0,37-39와 바울의 고백 중 하나인 다음 구절이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리 3,8).

교회사에 나타난 그런 종류의 해설과 달리 오늘 단락의 두 비유는 다음 두 가지를 정확히 가르치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를 찾은 ‘기쁨’을 누림. 둘째, 하늘나라를 위해 재산을 포기함.

예수가 전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우선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한다. 둘째, 기쁜 소식이다. 그런 기쁨을 우선 전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도 악한 사람 아니라면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다. 그런 기쁨을 전통적인 해설에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 적절하지 않은 해설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오늘의 비유에서 가난한 교회라는 메시지를 전통적 해설들이 놓친 사실이다. 재산에 대한 경고는 교회의 설교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성서를 잘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알고도 일부러 그런 것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난하지 않은 교회’는 ‘가난한 교회’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역사상 가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마태오는 오늘의 그리스도교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듯하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마태 13,22). 성서를 존중한다는 그리스도교가 성서를 탄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돈에 깔려 신음하는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염려된다. 그리스도교는 돈 귀신에 들렸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교회? YES! 가난한 교회? NO!’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의 분위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교회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입만 벌리고 돈만 걷으면 된다. 가난한 교회를 만들기는 아주 어렵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아직 한 번도 그런 역사를 교회가 만들지 못했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내세우면서 가난한 교회를 묵살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시대의 가톨릭교회에도 그런 위험이 계속될까 적이 걱정된다. 갈수록 교회 재산이 늘어가는 것은 인류에게도 하느님에게도 슬픈 소식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보다 가난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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