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3

36 그 뒤에 예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들어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 40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날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41 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태양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마태 13,36-43)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앞쪽 마태오 복음서 13,24-30에 나타난 밀과 가라지 비유의 뜻을 뒤늦게 해설하는 단락이다. 비유에 나타난 개념의 설명(36-39)과 심판 날(40-43)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밀은 제외하고 가라지만 해설하는 것이 특이하다.

38절에서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가리킨다. 세상은 교회보다 훨씬 넓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교회 밖에도 씨를 뿌린다! 마태오의 교회론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교회에서 흔히 못 본 척 지나치는 구절이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 말을 들을 당시 아직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36절에서 ‘예수가 군중을 떠났다’는 표현은 예수가 군중을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집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소개일 뿐이다. “집”은 초대교회에서 신자 교육의 장소였다. 37절의 “씨”는 대개 말씀을 가리켰다(마르 4,14; 마태 13,19). 그러나 38절의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를 가리킨다고 한다. 누가 하늘나라의 자녀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가라지가 뿌려진 “사람들이 잠들 때”(마태 13,25)를 이 대목에서 기억해야 하겠다. 그 잠든 사람은 ‘게으르며 부패한 성직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해석 역사에서 설명되었다. 마태 24,31과 디다케 10,5에서는 뽑힌 의로운 사람을 모으는데 중점을 준다면, 오늘의 단락에서는 악한 사람을 없애는 심판이 핵심 내용이다.

오늘의 단락에서도 심판에서 결정적인 것은 올바른 교리를 믿었느냐 여부가 아니라 제대로 실천했느냐 여부다(마태 7,15-23). 행동하는 믿음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리스도교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마치 믿는 내용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강조하여 왔다. 고백은 입만 벌리면 가능하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다.

‘행동, 실천’이란 단어만 만나도 ‘행업으로 인한 구원’을 연상하는 개신교 풍토는 바람직하지 않다. 남미에서 지배층 상당수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는데 그 동기가 야릇하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입을 벌려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 그 얼마나 마음 편하고 쉬운 일이냐는 것이다. 실천과 관계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생각은 마태오, 심지어 바울과도 거리가 멀다.

41절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로 번역된 그리스어 스칸달라(skandala)는 해석하기 어렵다. 성서에서 그 단어는 대개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어떤 행동을 가리켰다. 마태오는 18,6 단락에서 다시 그 단어를 써서 작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41절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그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한 경고다.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도 큰 문제다. 종교인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남을 죄짓게 만들기도 한다. 교회 역시 악행을 저지를 뿐 아니라 남을 죄짓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오늘의 단락에서 사람의 아들, 즉 예수는 좋은 씨를 뿌리기도 하고 악한 사람을 처단하기도 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부분이다. 마태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마태오가 설명하는 역사의 예수다.

첫째, 심판하실 주님은 역사의 예수다. 둘째, 예수의 가르침을 믿느냐 여부가 아니라 실천하느냐 여부가 심판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교 신자나 종교인이나 신학자 모두 정신 차리지 않을 수 없다. 행동 없는 믿음으로는 하느님께 구원받을 수 없다.

해석 역사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였다. “밭”은 개인, 교회, 세상 중 무엇을 가리키는가. “가라지”는 잘못된 가르침, 악한 사람 중 무엇을 가리키는가. 수학적으로 여러 경우의 수가 나오겠다. 그중에서 두 경우가 가장 자주 다루어졌다. 첫째, 교회는 과연 깨끗한가? 둘째, 그리스도교와 다른 가르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깨끗하지 않은 종교인이 깨끗하지 않은 교회에 흠 있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모습이다. 즉, 교회는 깨끗하지 않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교회 조직이나 종교인과 신자 모두 언제나 회개 의무를 지닌다. 회개는 교회의 존재 조건이다.

교회는 박해를 당하기도 했고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지금도 세상 어디에서는 교회가 여전히 박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의한 박해, 이웃 종교에서 오는 박해는 이전보다 크게 줄었다.

지금 교회는 남을 박해하고 있는가? 한국 그리스도교는 누구를 악마시하지 않는가. 자기 문제를 덮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수법은 교회에서도 낯설지 않다. 가톨릭이 이단이라는 글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렇게 가르치는 개신교 종파가 아직도 있나 보다. 씁쓸하고 안타깝다. 개신교를 비방하는 말을 가톨릭 신자들은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 잘못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되었지만, 그 분열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어떤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정확히 분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른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을 처벌하자고 우리가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비방할 필요도 없다.

이단을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을 믿는 사람의 양심의 자유는 존중해야 한다. 종교의 자유에는 믿을 권리도 포함되지만 믿지 않을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의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는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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