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판 신부와 아시아 신학 나머지 이야기(4)


이번에 치룬 피터 판 신부 초청행사는 예년과 준비 때부터 달랐다. 그동안 아시아신학연대센터는 오스트리아의 ‘여성주교’를 비롯해,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필리핀에서 신학자와 활동가를 초청해 이들의 경험을 듣고 나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피터 판 신부가 쓴 책들을 읽고 토론하는 준비세미나를 3개월 동안 진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관심사와 생각의 폭이 넓어서 쓴 글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어찌됐든 많지 않은 사람이 모여 진행한 토론 모임이었지만 판 신부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우리는 그가 미리 보내준 평신도, 아시아 교회와 신학, 선교 등에 관한 자신의 논문뿐만 아니라, 종교다원주의와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에 대해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공부하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구원”의 문제는 그가 이 주제와 관련해 쓴 책 때문에 바티칸의 조사를 받는 상황이어서 조심스러웠지만, 다종교사회인 한국의 경우 꼭 다뤄야 할 주제라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에게서 곧바로 온 답은 쉽고도 간결했다.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하니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메일을 통해 원고를 받았을 때 약간 당황스러웠다. 부탁한 강연원고 주제와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그리스도교(World Christianity)’라니? 처음 접하는 개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판 신부는 한국에 와서 이 주제로 강연을 하고 싶어했는데, 그 까닭은 이 세계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운동차원에서 확산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그리스도교가 뭐냐고 물으니,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찾자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대답을 들어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막연했는데, 판 신부가 이 주제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학생들과 토론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긴 시간을 두고 얘기할 만한 기회가 주어졌다.

그가 설명한 요지는 이랬다. 그리스도교는 애초부터 중동(中東)이라 불리는 서남아시아에서 태어나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마지막에 로마로 가게 됐고, 유감스럽게도 교회사가들은 이 사실을 반영하기보다는 주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로마화한 교회에 한정시켜 이야기해왔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사를 보더라도 다섯 총대주교좌(patriarchates), 곧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로마 가운데 로마만이 유일하게 유럽이고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에 그리고 나머지 세 곳은 아시아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판 신부는 자신의 글 이곳저곳에서 늘 로마를 한 ‘지역교회’(local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지역적 분포뿐만 아니라 교의적으로도 니체아 공의회(325)부터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까지 모두 7번에 걸쳐 열렸던 공의회도 서구가 아니라 동방에서 열렸다.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에 대한 교의가 마련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더욱이 현재도 또 앞으로도 거주민 숫자로 볼 때, 그리스도교인이 유럽과 북미보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 더 많이 살 것이다. 그럼에도 고향인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외래적’인 종교로 남아 있는 현실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과거에는 북미와 유럽에서 선교사가 와서 제3세계에 ‘선교’를 했는데, 이제 인구지형도가 바뀐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주장하는 세계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포기하자고 주창하는 운동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판 신부는 아시아 주교들이 강조하면서 새로운 선교관을 제시한다. 바로 대화를 통한 선교다. 그에 따르면 대화야말로 아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뿐 아니라 참 교회가 되는 새로운 길이다. 여기서 귀가 솔깃해진다.

판 신부는 대화를 단지 복음을 위한 도구뿐만이 아니라, 아시아라는 다종교사회에서 여러 종교와 열린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다른 말로 해서, 관계 속에서 자기존재의 근거를 파악하는 관계론적이고 연기론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는 종교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신학자들의 지적 대화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종교인의 공동 종교체험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또 헷갈리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언어가 다른 만큼 그 체험도 다르기 때문에 공동의 종교체험은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번에는 그것이 중요하고 또 그가 말하는 세계 그리스도교가 이루어나가야 할 운동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하니, 참으로 알쏭달쏭하고 모호하다. 판 신부에 대해 교의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호하다”(ambiguous)고 표현한 교황청의 태도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문득 ‘혹시 이렇게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판 신부의 전략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와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시각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차세대 아시아 신학을 선도해갈 수 있을 만큼 아시아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말라도스, 파니카, 피어리스, 발라수리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이 신학자들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60대 초반인 판 신부가 아시아 신학을 힘 있게 밀고 나간다면, 더욱 우리 토양에 뿌리내리는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세계 그리스도교” 운동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황경훈/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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