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2

31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습니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식물보다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33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인이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습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4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그리하여 예언자를 시켜,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창조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마태 13,31-35)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이스라엘에 여러 종류의 겨자씨가 있지만 오늘의 단락에서는 검은 겨자씨를 가리키는 것 같다. 1년생 식물인 겨자씨는 지름이 1㎜도 못 되지만 2~3m 높이의 나무로 자란다. 그 잎은 익혀서 내가 좋아하는 샐러드의 재료로, 그 열매는 양념과 약재로 쓰이고, 새에게 먹이가 된다.

유다교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두 매체, 즉 ‘구전(口傳) 토라(율법)’와 ‘쓰인 토라’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는 신화에 기초하는데, 서기 200년경 완성된 법률문서인 미쉬나(Mischna : ‘배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구전 토라의 최초 문서다. 미쉬나에서 겨자는 정원 식물이 아니라 들판 식물로 언급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여느 정원에나 흔히 보인다. 농부가 겨자씨를 ‘한 알’ 심었다는 본문 표현이 특이하다. 마르코처럼 마태오는 겨자씨와 다 자란 겨자나무의 엄청난 차이를 강조한다.

겨자씨의 비유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과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 그 비유를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처음 겨자씨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에 자유를 가져다줄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는 소재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큰 나무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는데 적당하다(에제 17,2-10; 다니 4,7-12).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는 모습은 커다란 송백나무에 비유되었다(에제 17,22-24). 레바논 계곡에서 자란 나무가 아니라 텃밭의 겨자나무를 예수가 비유에 사용한 것이 청중에게 놀라웠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유다인의 승리주의적 시각과 예수의 너무 약하고 소박한 겨자씨 비유가 대조적이다. 하느님 나라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의 작은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인가.

마태오 공동체 사람들에게 겨자씨의 비유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겨자씨의 비유에서 선교의 희망과 자신감을 얻었다. “새”는 유다교에서 이방인으로 비유되었는데, 겨자나무에 날아든 새에서 그리스도교로 몰려드는 이방인을 연상했다. 확대되는 이방인 선교를 하느님 나라와 연결시켰다. 마태오 공동체의 겨자씨 같은 자그만 노력이 겨자나무 같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리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공동체는 승리주의에 빠지진 않았다.

누룩의 비유는 여인의 일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부는 빵집에서 누룩을 사거나 스스로 만들었다. 누룩은 그리스인이나 유다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누룩의 엄청난 양이다. 누룩 “서 말”은 약 40리터에 해당하고 150명을 위한 한 끼 식사에 필요한 50㎏ 정도의 빵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다. 당시 유다인 주부가 그렇게 할 일은 거의 없다.

청중은 예수의 누룩 비유에 다시 놀랐을 것이다. 누룩이 하느님 나라 비유에 쓰인 적이 유다교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절 축제에서 오히려 겨자씨는 희생제사에 쓰이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그렇게 겨자씨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서 말 밀가루의 성질을 바꾸는데 누룩보다 소금이 더 적격이다. 숨겨진, 그러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누룩을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비유하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교회 역사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 비유를 승리주의로 해석한 시초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사건이다(서기 313년). 예수는 씨 뿌리는 분으로, 겨자씨는 교회로 여겨졌다.

그 후 놀라운 교회 확장으로 교회는 자신을 다 자란 겨자나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회가 정치권력의 하녀가 되는 줄도 모르고 승리주의가 교회 몸에 밴 것이다. 한때 국가 안에 교회가 있었는데, 이제 국가가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루터는 교회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지 50년 되는 지금도 ‘교회’를 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천주교 성직자들이 여전히 있다.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종교를 강화하려는 야심이 서양 그리스도교의 DNA처럼 우리에게 전해졌다.

승리주의는 그리스도교를 망치는 주범 중 하나다. 그 피해를 지금 그리스도교가 고스란히 겪고 있다. 오늘날 추락하는 유럽 교회는 병든 겨자나무 꼴이 되었다. 승리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승리주의 분위기가 만연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분위기가 염려된다.

겨자씨는 예수의 말씀, 교회의 가르침, 복음, 신앙, 사랑 등으로도 해석되었다. 그러한 개인주의적 해석, 교회론적 승리주의 해석은 심판을 의식하는 마태오의 비유들의 본래 뜻과 거리가 멀다. 근대에 이르러 그러한 좁은 해석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신자 개인과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 예수는 교회 안에 갇혀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에 대한 독점 소유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예수는 교회 밖에도 당연히 계시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사실은 마태오 공동체에 커다란 의문으로 남았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예언자의 말을 빌려 유다인의 완고함을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는 35절에서 예언자의 말이라 해놓고 엉뚱하게 시편 78,2을 인용해 버렸다. 이런 실수를 합리적으로 해명하긴 어렵다. 비슷한 실수가 마태오 복음서 27,9에서 또 보인다.

자그만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지켜본 예수의 안목이 놀랍다. 교회의 승리주의가 큰 잘못이라는 점을 오늘의 본문에서 또한 느꼈으면 좋겠다.

사족. 복음서는 예수의 활동을 생중계한 것이 아니라 녹화 중계하는 것이다. 촬영 후 방영을 기다리는 시간에 편집자가 촬영 장면을 새로 만들어 넣거나 빼기도 하였다.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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