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765㎸ 송전탑 공사 재개된 밀양 현장
이른 아침, 동화전 마을회관에는 벌써 어르신들이 현장으로 올라갔고, 토닥토닥 밥 포차도 아침과 점심을 모두 현장으로 전달한 상황이었다. 나는 밥 포차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밥 포차에서 제공한 갈비탕을 맛나게 먹었다. 식사 후에 미처 현장으로 올라가지 못하신 할매를 모시고 96번 현장으로 올랐다.
여든이 넘은 할매는 허리가 굽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가방을 챙기셨는데,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가방 안에는 삶은 밤이 가득했다. 할매는 이 밤을 산 위에서 함께 계시는 분들과 나눠먹기 위해서 등에 지고, 손에 들며 산으로 오르시는 것이었다. 나는 할매의 가방을 대신 짊어졌다. 묵직했다. 그 무거움만큼이나 갑절로 먹먹함이 밀려왔다.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가파른 산길을 오르시는 것이었다.
96번으로 가는 산길은 지난밤의 폭우로 인해 미끄러웠다. 할매의 지팡이도 자주 미끄러졌다. 산을 오르며 잠시 쉴 수 있는 바위만 나오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내가 “할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산엘 오르시능교? 그냥 집에서 쉬세요”라고 말하자 “뭔 소리고. 내 몸이라도 함께 보태야지. 한 사람의 힘이라도 보태야지”라고 하시며 다시 산을 오르신다.
그렇게 30여 분을 올랐을까. 96번 현장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도 대규모 경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다른 현장에서처럼 검문검색을 하거나 출입을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병력의 수에 놀랐다. 할매들이 거주하는 움막 앞에는 나무에 걸려 있는 하얀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위양마을의 움막에서 보던 밧줄과 같았다. 그 움막을 지나 송전탑이 세워질 현장으로 가는 길에는 나쁜 언론에서 매도했던 웅덩이와 또 다른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평밭마을에서 봤던 ‘무덤’과도 같은 웅덩이였다.
96번 현장을 지키던 어르신들이 위양마을과 평밭마을을 방문하고, “위양마을과 평밭마을 주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당찬 결의의 상징인 웅덩이와 밧줄을 보고 ‘우리도 위양과 평밭마을 주민들처럼 이와 같은 각오와 결의를 다져야하겠다’라고 생각하며 웅덩이를 팠다”라고 하셨다.
보수 언론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통진당 당원들이 무덤을 파고 밧줄과 기름을 준비해서 어르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라고 왜곡 보도한 현장이었다. 이 보도에 의해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밀양시장과 경남도지사까지 ‘이념투쟁으로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외부세력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다. 경북의 한 언론에서는 이 현장을 ‘공비들의 소굴’로까지 보도하고 있다. 이곳의 어르신들은 경찰과 한전 직원들에 의한 폭력적 분위기 속에서, 밀양의 현실을 왜곡하는 보수 언론과도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계셨다.
또한 어떤 어르신은 산을 올라오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밀양시에서 주민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내어놓으며 진노하셨다. 지금의 밀양시장은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서는 시점에 시민들에게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하려면 내 머리에서부터 송전탑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며 송전탑 건설 반대 명분으로 유권자들에게 표를 호소하고 당선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송전탑 건설을 위한 전선에 앞장서고 있다.
내가 찾은 96번 현장에는 초록농활학생연대의 10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외부세력’이었다. 그들은 지난 5월, 탈핵희망버스 때도 밀양을 방문해 84번과 85번 현장을 지켰다. 학생들은 어르신들께 들국화로 꽃팔찌와 꽃반지를 만들어드렸다. 할매들이 그렇게 좋아하시며 활짝 웃는 모습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은 할매들을 위하여 짧은 문화공연을 하면서 저 유명한 ‘밀양송’을 합창하기도 하였다. 밀양송이 울려퍼지자 몇몇 할매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이 아름다운 학생들이 저들이 말하는 ‘외부세력’이며 ‘이념투쟁’을 확산시키려는 세력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가소롭고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학생들과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96번의 길고긴 가파른 길을 내려오면서 지천에 깔려 있는 밤송이들을 보았다. 밀양의 어르신들은 풀죽을 먹으며 소작으로 받은 세경을 모아 황무지였던 이 돌산을 구입했다. 땅 한 평도 없이 남의 땅을 붙여먹던 어르신들이 자신의 땅에 밤나무 묘목을 심었다. 밤새도록 험한 돌밭을 개간하며 나무를 심으면서도 고된 줄을 몰랐고, 그저 마냥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묘목이 성목이 되어 밤을 주렁주렁 매달고, 한 해의 살림살이 밑천이 되었다.그런데 그 행복했던 꿈의 산에 초고압 송전선로를 위해 거대한 송전탑이 선다고 한다. 이 땅의 주인이 한전으로 탈바꿈되고,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땅에서 나가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어르신들은 넋 나간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게 자식 같은 땅을 지키기 위해 경찰과 한전의 폭력 앞에 맨몸으로 맞선지도 8년의 세월이 지났고,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오늘도 밀양의 고립된 산과 길 위에서 고향과 땅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어르신들께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빈다.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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