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0

“18 여러분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보시오. 19 누구든지 나라의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길바닥에 뿌려진 씨가 그것입니다. 20 그러나 바위 위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21 그러나 그는 자기 안에 뿌리가 없어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그는 곧 넘어집니다. 22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 유혹이 말씀을 억누르고 그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태 13,18-23)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18절에서 마태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고 말하지만 이 명칭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그보다 씨의 운명에 대해 언급된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씨에 해당되는 사람과 동일시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이 왜 예수의 말씀을 거절할까? 마태오 공동체에게 커다란 의문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에도 마태오는 관심을 가졌다. 오늘의 단락은 마태오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공동체에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는 않다고 마태오는 경고하고 있다.

마태오가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4,13-20에서 “여러분이 이 비유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비유들을 알아듣겠습니까?”라는 구절을 마태오는 삭제하였다. 마태오에게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아니다. 군중처럼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설명을 듣고 이해하게 되는 사람들이다(마태 13,36-52; 15,12-20; 16,5-17). 예수를 통해서 제자들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마르코가 예수와 함께 유랑하던 제자들을 더 의식한다면, 마태오는 부활 이후 초대교회 신자들을 더 의식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느님이 심은 나무로 표현한 것(이사 60,21; 예레 45,4)을 마태오는 알고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을 믿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그 뿌리가 탄탄하다(예레 17,8; 에제 31,2-5; 시편 1,3).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은 뿌리가 약한 나무 같다(이사 40,24).

길바닥에 뿌려진 씨앗 같은 처지의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말씀을 빼앗긴 사람과 다름없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 같은 사람은 환난과 박해 때 그 운명이 드러난다. 박해는 마태오 공동체가 유다인들에게 실제로 겪었다(마태 5,10-12; 10,23; 23,34). 환난에는 이방인에게서 오는 어려움도 포함된다(마태 24,9.21.29).

가시와 가시밭은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유다교적 표현이다(창세 3,18; 예레 12,13). 가시밭에 떨어진 씨 같은 사람이 오늘의 단락에서 최악의 경우에 해당한다. 22절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부분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는 마태오 복음서 6,19-34 부분을 연상시킨다. 22절을 행동주의에 대한 경고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23절 백 배의 열매는 예외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언제 열매의 모습이 나타나는가. 그 열매가 현세의 삶과 연결되는지, 최후의 심판에 연결되는지 본문에서 뚜렷하지 않다.

23절의 “실천”(poiei)이라는 단어는 공동번역 성서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빠져 있다. 그 단어가 없으면 23절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내가 옮겨 넣었다. 말씀은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알기에 실천하기도 하지만, 실천해야만 비로소 말씀을 알기도 한다.

실천이 먼저고 깨달음이 나중인 진리가 세상에는 많다. 그리스도교에서 인식론은 철학이나 이웃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실천을 통한 인식을 그리스도교는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인식론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행동하기 위해 이해한다. 둘째,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이해한다. 수학적 · 철학적 진리와 종교의 진리는 같은 차원에 있지 않다. 듣고 이해하고 실천함은 유다교뿐 아니라 마태오에게도 해석의 필수 3개 요소다. 23절은 마태오 해석학의 핵심 문장이다.

박해나 환난보다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 더 방해된다! 마치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두고 예수가 따끔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리스도교는 박해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몰락한다. 그리스도교는 박해에는 당당히 저항하지만 재물의 유혹에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상한 행태를 보여준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겪고 있는 위기는 정치권력의 박해 때문에 생긴 위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돈을 너무 많이 가진 탓이다. 교회는 돈을 모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교회 재산을 줄일 방도를 어서 찾아야 한다. 신자들에게 헌금을 거둘 일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 재산을 나눌 일이다. 주일에 헌금을 요구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돈을 조금이라도 타 가도록 하면 어떨까. 지금 한국 그리스도교에는 돈이 넘쳐난다. 이른바 IMF 위기 때 변함없이 헌금을 거두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에 나는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하였다. 종교인들이 돈의 유혹에 약한 것은 인류의 불가사의 중 하나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식으로 잘못 설교하기도 한다. 헌금 액수와 하느님의 축복은 서로 아무 관계없다. 성직자는 백 배 보상을, 수도자는 육십 배 보상을, 신자들은 삼십 배 보상을 받는다는 엉뚱한 해설도 있었다. 오늘의 본문과 아무 관계없는 해설들이다.

오늘의 단락은 마태오 공동체에 대한 자기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공동체에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는 않다고 마태오는 경고하고 있다. 그 경고는 오늘의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된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처럼 그리스도교는 재물의 유혹에 빠져 있다. 단순히 재물의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미 돈다발 속에 빠져 숨 막혀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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