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하루 종일 바람이 불었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가을을 느꼈다. 정겹게 따사로운 햇살 속에 부는 바람이 새삼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을을 느꼈다는 것은, 촘촘한 일상을 살면서도 약간 한눈을 팔며, 하늘이 푸르다든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린다든지 거리를 걷는 꼬마들과 눈이 마주친다든지, 혹은 그저 “하느님” 하고 불러본다든지 하여, 내 마음의 결이 달라진 채, 다시 일상을 만난다는 뜻이다. 이 느낌은 마치 혼자 다른 세상 하나를 마음 깊이 숨겨둔 채 이 세상을 사는 것과도 같은데, 내가 가을을 느꼈다는 건 이렇게 내 마음의 틈새가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박홍기
그런데 요즘 나는 전혀 한눈파는 일 없이, 가을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아주 성실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거리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새 학기가 시작되고 그럴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사실 여전히 창밖이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글을 쓰고 읽기는 했다. 단지 팍팍한 느낌 속에, 무심히 창밖 정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없이, 시간의 흐름이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 등에 무심한 채, 그저 책을 읽으며 글을 썼던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상의 질감을 만져보지 못한 채 팍팍한 날들을 지냈다는 말이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영신수련 문헌 공부를 하지 않겠냐는 초대를 받았다. 평생 영신수련만 연구하고, 그 보급에 힘썼던 예수회의 노(老) 사제가 직접 가르치는 마지막 강의가 될 거라는 귀띔과 함께.

망설이다 우선 와서 보라는 강한 권유에 이끌려 그 모임에 갔다.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을 기술하신 스페인어를 나는 잘 모르지만, 원전을 보면서 내가 알던 용어나 그 글귀의 의미를 찾아가는 수업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영어 성경 공부하던 때의 마음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따스한 바닷물 속에 잠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드러운 담요를 두르고 아주 좋아하는 시를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날 밤, 도대체 나를 감싸고 있는 행복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했다. 그리고 영신수련이란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내가 누린 이 근거 없는 행복감이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풍성함” 앞에 모든 것을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멈추어서 아주 천천히 그 넉넉한 행복을 누렸다. 또한 그 넉넉함은 평생 배우는 사람으로 사는 행복을 놓치지 말라는, 아주 깊은 내면의 울림으로 마음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일상에 그런 풍성함을 본, 그러나 내가 소홀히 흘려보낸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지난주 학생들과 성체성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와 함께 ‘사랑의 식사’(Eucharist)를 하자고 했다. 그날도 나는 교수회의에 쫓겨 시간이 없었는데, 아무도 음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부랴부랴 슈퍼마켓에 가서 치즈와 포도주스, 그리고 빵을 사서 교실로 뛰어갔다. 그러면서 나는 학생들이 깜짝 놀라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나는 강의실 복도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복도에 가득하고 다른 교실에서 강의하던 교수들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열다섯 명의 학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성스레 음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물론 나는 성체성사가 교회의 기초 원리라고 가르칠 심산이었지만, 정작 하느님의 갑작스런 이런 풍성함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세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의 하느님 아버지의 “풍성함(fecundity)”에 관한 가르침이 떠올랐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우리는 모두 행복해 했는데, 무엇을 느꼈냐고 물으니 한 학생이 “식탁의 풍성함이 참 좋았다. 매일 이렇게 수업하면 좋겠다”라고 했다. 또 나는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또 한 번 하느님의 목소리를 느꼈다. 걸음을 멈추고, 나의 풍성함에 머물라는 그분의 목소리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가을에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 미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교목을 둔 덕에, 나는 매일 미사를 차리고 준비한다. 솔직히 어떨 때는 참 지친다. 그런데, 한 학생이 자청해서 일주일에 하루는 미사 준비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학생은 목요일 마다 성당 제의실(祭衣室)에 들러, 버려진 듯한 제의실을 청소하고 성작 수건도 깔끔하게 정돈해 준다. 그와 함께 제의를 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존재가 나를 위로하고 있음에 감사했다. 수도생활하면서 내가 만난 사람들, 사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나를 많이 위로해 주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런데 매일 미사에 새로운 남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가을 학기가 시작되고부터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픈 스무 살의 열정이 느껴진다. 그에게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 만연한 보수주의 성향과 분노를 본다. 오늘도 그가 평일 미사에 왔다.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런데 그의 까만 눈을 들여다 본 순간, 그가 외로웠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자주 진보나 보수라는 잣대로 사람을 구분하고, 내 편 네 편을 가르기도 한다. 그런데 진정한 성체성사의 자리, 교회는 하느님이 주시는 “풍성함” 가운데,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편안히 받아들여지는 그런 자리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젊은이들이 거쳐야 할 신앙의 발전 단계를 무시한 채, 아직 가톨릭적인 기초를 더 배우고 익히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내가 추구하는 영성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나는 보수적인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단계가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함께 기도하면서, 그렇게 함께 나누면서, 조금씩 지평을 넓혀 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 같다. 미사 후 제의실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바람이 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넉넉해졌다. 한 학생은 사무실에 찾아와 자기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갔고,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컴퓨터로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학기말 페이퍼 주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나는 창밖에 부는 바람을 보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라고.

어쩌면 이번 한 달, 하느님께서 나를 초대하는 자리는, 한눈을 파는 아이 같은 마음에 깃드는 하느님의 풍요함인 듯하다. 바람 부는 자리에서 만난 이 아름다운 가을. 바람 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설 때, 내 마음에 조그만 틈새가 생기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일상 속에 마련해 두신 하느님의 풍요로움을 만난다. 오늘 하루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은 내게, 가을 속으로 걸어오라고 속삭인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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