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9
10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군중에게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 그러나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여러분이 알도록 되어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12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겠지만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13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비유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14 그리고 이렇게 말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그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왜냐하면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나에게 고침을 받으리라.’
16 그렇지만 여러분의 눈은 보고 있으니 복이 있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복됩니다. 17 나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보고 싶어 했지만 보지 못했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들으려 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마태 13,10-17)
‘예수께서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오늘 단락의 주제다. 비유가 무엇인지, 군중이 누구인지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하겠다.
마태오 공동체 상황을 알면 오늘의 단락이 잘 이해되겠다. 서기 70년 로마 군대에 대한 유다인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다. 유다 전쟁 직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해외로 도피하였다. 마태오 복음서가 쓰인 때로 추측되는 서기 80년경, 예수의 제자들은 유다교 회당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마태오가 볼 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은 지배층 유다인과 가난한 군중, 두 부류였다. 지배층 유다인은 예수를 철저히 거부하였고, 가난한 유다인들은 예수를 관망하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을 ‘제자’,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지배층과 지켜보기만 하는 가난한 사람을 ‘군중’―이렇게 마태오는 크게 둘로 나누어 오늘의 단락을 구성하였다.
10절에서 제자들은 비유의 의미에 대해 아예 묻지도 않는다. 제자들은 이미 비유의 뜻을 알고 있다고 전제된 것이다. 그들은 그저 예수가 군중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까닭을 묻는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군중이나 그 지식 수준에 차이가 없다. 그들 모두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다.
비유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교육 방법이다. 예수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시골 사람을 상대로 시골에서 활동하였다. 시골 사람들의 삶에서 공통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였다.
바울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주로 도시 사람들을 상대로 도시에서 활약하였다. 바울의 청중은 대부분 도시의 중산층이었다. 바울처럼 화려한 수사법이나 철학적 논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방법은 아니다. 예수와 바울은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다. 바울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당시 신자들이 얼마나 지식 수준이 높으냐며 감탄하는 설교자도 있다. 어이없는 설교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예수는 여러 차례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13절은 모순된 말씀 아닌가. 군중처럼 제자들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인가. 제자들이나 군중에게 똑같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알아들었지만 군중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해야 옳지 않은가. 비유로 말해서 군중이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니까 비유로 말씀하셨다니 또 무슨 말씀인가.
예수의 말씀을 이미 알아들은 제자들과 거부한 사람들을 나누기 위해 13절은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인용된 이사야서 6장 9절 단락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해온 대표적인 구절이다. 비유 탓에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거부한 사실을 비유가 두드러지게 드러낼 뿐이다. 비유는 제자들에게 소통의 도구였지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통의 상징이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으로 변한다. 성서도 악마가 인용하면 독이 된다.
마르코와 마태오가 제자를 보는 눈은 같지 않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군중처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마르 4,13). 그러나 마태오에게 제자들은 군중과 철저히 구분된다(마태 13,51; 16,12; 17,13). 제자들은 믿음이 적지만(마태 6,30; 8,26; 14,31; 16,8) 믿음이 없거나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마태 15,16; 17,4). 마르코는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마태오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마태오는 예수를 받아들인 제자들이 너무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래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고 애쓴 것 같다.
12절은 교회사에서 지금도 크게 오해되는 말씀이다. 자본주의의 추악한 논리를 예수가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가 자본주의의 특징을 벌써 아셨다고 엉터리로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상상에 기초한 설교에는 설득력이 없다.
12절의 ‘가진 사람’은 문맥으로 보아 하늘나라의 신비를 가진 사람, 즉 제자들을 가리킨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은 갈수록 그 신비를 더 잘 깨닫게 되리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열정으로 탐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이 더 주신다. 하느님은 빈 잔에 물을 채우시지 않고 가득 찬 잔에 물을 채우신다.
지혜로운 사람은 갈수록 더 지혜롭게 된다. 하느님께 관심 없는 사람이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 성서를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알까. 게으른 사람은 그나마 지닌 지식도 갈수록 녹이 슨다. 게으른 종교인은 갈수록 더 무식해지고 고집만 늘어난다.
11-12절에서 예정설을 이끌어낸 학자들도 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설명이다. 엉터리 해설이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류의 예정설도 교리로 가르친 적 없다.
성직자, 수도자, 신학자 등 교회 안의 일부 특수한 사람들만 따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는다고 해설한 사람도 있다. 역시 엉터리 해설이다. 예수는 어떤 종류의 엘리트주의도 가르친 적이 없다.
예수는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극소수 특별한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진리가 전수된다고 믿은 에세느파와 예수는 서로 아무 관계없다. 오늘 단락에서 제자를 곧 성직자로, 군중을 평신도로 이해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그렇게 오해하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많다.
‘군중에게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를 해방신학자들은 이렇게 번역하는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로메로 대주교도 회개한 이후 그 주제로 고뇌하였다.
그것에 나는 하나 덧붙이고 싶다. ‘신학자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부자와 권력자를 위해 신학 정보와 지혜를 빌려주는 사람도 있다. 성직자 독재를 후원하기 위해 지식을 팔아먹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면 못쓴다. 신학자가 자기 영혼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신학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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