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8

1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큰 군중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배에 올라 앉으셨다. 그리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 3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보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곧 싹이 텄습니다. 6 그러나 해가 뜨자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싹이 타고 말라버렸습니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습니다. 8 그러나 다른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습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마태 13,1-9)

호숫가에서 예수는 제자, 아니 동지들을 처음 만났다(마태 4,18). 몰려든 군중은 예수의 동족 유다인들이다. 군중과 야외는 잘 어울린다. 예수는 배에 오르신다. 마태오 복음서 독자는 예수가 폭풍을 잠재우던 장면을 곧 떠올릴 것이다(마태 8,23). ‘배’는 예수와 군중 사이 일정한 거리를 나타내는 데 쓰였다(마태 14,3; 15,39). 스승은 앉아 있고 학생은 서있는 모습은 유다인에게 익숙하다(마태 5,1; 15,29; 23,2).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보다 ‘밖’에 서 있는 예수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는 풍경이다(마태 12,46-). 마태오는 지금까지 비유를 자주 소개했지만 파라볼레(parabol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마태오 복음서 13,1-36에서 집중적으로 쓰이는데 다른 곳에서는 3번만 나타난다. 예수가 공개적으로 군중을 향해 말할 때 그 단어가 쓰인다.

▲ <사도들을 부르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1481년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렸는지 언급되지 않았다. 농부들은 가을에 일찍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첫 비 내린 후 초겨울에 늦게 뿌리기도 하였다. 비 오기 전 가을에 갈지 않은 땅에, 여름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속에 씨앗을 뿌린다. 비 오는 계절에 먼저 땅을 갈아엎고 파헤쳐진 잡초가 마르기를 기다려 씨를 뿌리고 다시 땅을 갈아엎는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일찍 씨 뿌리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팔레스타인 산악 지방의 바위에 습기를 머금은 흙이 보통 얇게 덮혀 있다. 그 위에 씨를 뿌리기도 했다. 언제 씨앗이 뿌려진 것인지 자주 토론되었지만 본문에서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시기 문제는 비유 이야기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언제 뿌리든 씨를 뿌린 후 땅을 갈아엎었다. 날씨 사정도 언급되지 않았다.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마태오는 말이 없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도 없다. 4절부터 씨앗이 중심 단어다. 마태오는 오직 수확된 열매의 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 단락의 예수 말씀에 허술한 곳이 많다. 길바닥에 일부러 씨를 뿌리는 농부가 어디 있기나 할까.

8절 수확 이야기는 현실적일까. 씨앗 대비 4~9배 수확이 보통이고 좋은 땅에서 예외적으로 10~15배 소출을 거둔다는 기록이 있다. 땅 전체의 소출을 말하는 것인가. 열매의 양을 씨앗의 양과 비교하는 것일까. 후자의 경우를 마태오는 가리킨다. 예수는 수확량 차이를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하였다. 교육적인 목적으로 여러 종류의 땅을 등장시키고 그 의미를 해설하려는 것이다.

실패한 씨앗과 엄청난 수확량의 대조, 씨 뿌리는 시기와 수확하는 시기의 대조를 오늘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겠다. 9절의 어투는 마태오 복음서에 모두 세 번(마태 11,15; 13,9; 13,43), 13장 비유 부분에서 두 번 보인다. ‘들어라’는 단어는 13장에서 무려 16번 보인다. 그토록 애타게 외치는 예수의 말이니, 우리도 경청하자.

예수는 이분법과 과장법을 즐겨 쓴다. 가난하고 무식한 청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는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화려한 수사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의 어법을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수가 사용했더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는 벌써 외면당했을 것이다. 예수가 왜 비유를 즐겨 사용했는지 차차 더 드러난다. 오늘 비유의 해설은 다음 단락에 나온다.

흔히 이 단락의 제목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고 부르곤 한다(공동번역, 슈바이처 주석서). 그러나 ‘씨앗의 비유’가 내용상 더 적절한 제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호숫가에 앉은 예수는 마치 문학청년 같다. 예수라고 어찌 외로움을 몰랐을까. 아마 우리보다 훨씬 더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뿐 아니라 제자들 속의 외로움 말이다.

예수의 인성(人性)을 사실상 외면하는 한국의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 곳곳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처럼 인간성을 훌륭히 발휘한 분이 인류 역사에 흔하지 않다. 인성이 없기에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완벽하기에 예수의 신성이 빛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다.

독일어 한 문장만 제게 허락하시라. ‘오직 하느님만 예수처럼 그렇게 인간적일 수 있다(So menschlich wie Jesus kann nur der Gott sein.)’ 예수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배우고 싶다. 거룩한 모습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실제 예수에 더 가깝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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