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7

46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하고 싶어 했다. 47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고 선생님과 말하기를 원합니다.” 48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 그리고 누가 내 형제들입니까?” 49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손을 제자들에게 내미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여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있습니다. 50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12,46-50)

▲ <성가정>, 무리요(1660)
‘집’에 대해 전에 말하지 않았기에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 알기 어렵다. “밖”이란 단어는 예수의 가족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암시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3,31-35에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3,21)라는 난감한 부분을 마태오는 삭제해 버렸다. 가족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반응도 놀랍지만 제자들이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특이하다. 제자들은 12,2 이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다닌 것 같다. 마리아의 딸들, 즉 예수의 자매들은 당시 관습에 따라 집에 머문 듯하다. 예수의 부친 요셉은 일찍 사망했다는 전승이 있다. 만일 요셉이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이 단락에 등장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마태 23,9)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나 사제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여전히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베드로나 바울도 그런 호칭을 누구에게 들어본 적 없다. 추기경, 주교, 몬시뇰, 더구나 신부(神父)라는 경망스런 호칭까지. 가톨릭교회에는 호칭이 많기도 하다.

손을 내미는 행동은 도움의 손길(마태 12,13), 축복(창세 48,14), 하느님의 심판(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등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병자에게 향하는 예수(8,30),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내미는 예수의 손길(14,31) 같은 경우가 보인다.

제자들을 가리키는 예수의 손은 제자들이 예수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마태 28,20). 제자는 유다교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킨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제자들을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마태 25,40; 28,10). 신앙공동체는 한 가정이다.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50절에서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교황도 신학자도 신자도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거나 목사 안수를 받으면 마치 구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천국행 티켓을 예약한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매들을 배려하여 예수는 자매라는 단어를 50절에 포함시켰다.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 제자들을 예수는 잊지 않은 것이다.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우리 시대 기준에서 그리 파격적으로 보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놀랄 만큼 개혁적이다. 당시 유다교에서 여성을 제자로 맞아들인 그룹은 오직 예수 운동뿐이다.

그러한 예수의 마음과 자세를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느끼고 있는가. 사회개혁에 앞장서는 일부 가톨릭 사제들이 신자를 대하는 태도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도 많다.

예수의 ‘육신의 가족’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교 회당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해설도 교회 역사에서 있었다. ‘예수와 제자는 한 가족’이라는 오늘 단락의 긍정적 의미보다 엉뚱하게도 부정적 해석에 치우치는 경우가 교회사에서 더 많았다. 영지주의자(그노시스주의), 마르치온 추종자 등은 오늘 단락을 근거로 예수는 육신의 부모 없이 탄생했다고 주장하였다. 가족 윤리를 무시하거나 마리아 신심을 비판하는 용도로 잘못 인용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단락을 근거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오늘 본문의 본래 의도와 거리가 먼 해석들이다. 가족 윤리를 강조하고 마리아 신심이 싹트기 시작한 초대교회에게 오늘의 단락은 적지 않게 당황스럽기는 하겠다.

내 대학 시절 수필가로 유명하던 모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47절 예수의 ‘형제’ 구절을 근거로 ‘마리아 평생 동정’을 반박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동정 교리를 생물학적으로 그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48절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라는 구절을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불손한 태도로 보고서 마리아 신심을 비난하던 사례도 개신교에 적지 않다. 오늘의 단락은 마리아 신심을 논하는 자리가 전혀 아니다. 예수의 가족에게 모욕을 주려는 단락도 아니다. (예수의 형제, 자매 문제는 마태오 복음서 13,53-58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라는 말씀이 오늘 단락의 유일한 주제다. 우리는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될 기회와 가능성을 지닌 위대한 존재다. “여러분은 스승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태 23,8). 이 구절은 아쉽게도 가톨릭 교회론에서 외면당해 왔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세례 여부, 종교에 관계없이―은 모두 예수의 제자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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