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765㎸ 송전탑 공사 재개된 밀양 현장

▲ 여수마을 위 126번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장영식

전날 바드리 88번과 89번 그리고 84번과 85번으로 진입할 수 있는 평리 입구에서의 비박으로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6번 현장이 심상치 않아 경찰의 철저한 검문검색을 통과하여 126번 현장을 올랐다.

30여 분을 걸어 올라간 126번 현장에는 여전히 대규모 경찰병력과 한전 직원들이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밤을 새운 주민들은 공사 현장으로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경찰병력에 의해 원천봉쇄되고 있었다. 주민 20~30여 명은 나를 보자마자 경찰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바빴고, 산을 타고 오신 어르신은 119 차량으로 가서 부상당한 팔을 치료받았다. 10월 3일 나에게 부상당한 팔을 보여주셨던 할머니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계시지 않았다.

여전히 126번 현장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3일 간의 단식 끝에 급격한 저체온 현상으로 인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던 김영자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총무는 126번 현장에 올라와 있었고, 함께 단식 중이었던 성은희 · 신난숙 주민은 병원으로 후송되고 없었다. 나는 이 처참한 현장을 뒤로 하고 다시 김영자 총무와 함께 109번 현장으로 향했다.

▲ 126번 현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수마을 어르신들이 경찰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장영식
▲ 126번 현장으로 가는 길 곳곳에 경찰병력이 이중삼중으로 검문검색을 하며 통제하고 있다. ⓒ장영식
▲ 김영자 총무님과 함께 109번 현장으로 가기 위해 산을 올랐다. ⓒ장영식
▲ 109번으로 가는 산길에도 경찰에 의해 검문검색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장영식
▲ 숱한 사람들이 이 땅을 밟앗으리라 짐작되는 흔적들 ⓒ장영식

109번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곡마을회관 주변에 차를 주차하고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해야 했다. 김영자 총무는 발이 시원찮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하며 산길을 걸었다. 거친 산길에 온몸이 땀으로 비를 맞은 듯했지만, 차마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 산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땅은 굳어 있었다. 경찰의 군홧발 때문일까, 길이 아니었던 곳도 새 길이 열려 있었다.

얼마 오르지 않아 경찰의 검문검색이 시작되었다.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첫 검문검색 후에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을 올라야 했다. 김영자 총무가 없었다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렇게 1시간 넘게 가파른 길을 오르자 또다시 경찰의 검문검색이 있었다. 그들이 안내하는 길을 오르자 109번 현장에 이르렀다.

109번 현장 가까이 있던 10여 명의 주민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셨다. 나는 펜스가 쳐져 있는 근처까지 가고자 했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았고, 현장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자 한전 측에 연락을 취한 후에 개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어르신들이 펜스 가까이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109번 현장은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 가파른 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철탑이 설 곳에 대한 터 파기가 완료되지 않은 듯 인부 한 명이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벌목과 채굴로 산은 파헤쳐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4공구에 있었던 자재들을 밤새 헬기로 수송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재들은 짙붉게 녹슬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전의 공사 감독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 109번 현장의 어르신들은 경찰을 향해 “제발 공사 현장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며 빌고 있었다. ⓒ장영식
▲ 109번 현장은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곳이었으며, 송전탑이 설 곳은 아직도 터 파기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장영식
▲ 109번 현장, 어르신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영식
▲ 109번 현장의 경찰 방벽은 너무나 견고하였다. ⓒ장영식
▲ 어르신들은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몸을 경찰 방벽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장영식
▲ 경찰에 의해 고착된 어르신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장영식

공사 현장을 나와서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나오니 50여 명의 어르신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이 가파른 산 정상에서 어르신들이 매일 같이 교대로 농성장을 지키고 계셨다. 어르신들은 밤이슬을 피할 천막도 침구도 없이, 얇은 깔판 또는 맨땅에 찬 이슬을 맞으며 109번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126번에서 받은 충격과는 또 다른 충격이 엄습해왔다.

어르신들은 공사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경찰의 방벽에 온몸을 던지며 “공사 현장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비명에 가까운 절규를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사흘 동안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하고 단식했던 김영자 총무도 눈물을 흘리며 경찰의 방벽 앞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풍경 앞에 셔터를 끊는 것 자체도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고향을 지켜 달라” “우리 땅을 지켜 달라”며 울부짖었다.

어르신들은 산을 오르기 전에 준비한 주먹밥 하나로 109번에서 사투하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초입부터 경찰의 검문검색을 받아야 하는 데, 가방 속에 있는 침구류는 모두 압수 당한다고 한다. 식수도 태부족인 상태에서 어르신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을 치르고 계셨다.

어느 할머니께서 나에게 달려와 내 옷깃을 붙잡으며 “우리 좀 살려 달라”라며 애원하셨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리고 등을 토닥거렸다. 내 작은 품에 쏙 들어올 만큼 가녀린 할매의 몸은 내 가슴팍에서 울고 계셨고, 나도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젊은 경찰들도 이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느 두 분의 할머니는 농성 첫날의 경찰 폭력을 증언하셨다. 경찰은 공사 재개에 항의하는 어르신들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두 분의 할머니가 비탈진 곳으로 떠밀려 처박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강압적으로 주민들을 몰아붙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경찰의 도움으로 다시 나왔지만, 온몸에는 피멍 투성이라며 울먹이신다. ‘얼마나 외롭고 고된 고립 속에서의 농성일까’라고 생각하면 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왔다.

어르신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위로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국가인권위에서 나온 세 분과 마주쳤다. 김영자 총무와 나는 어르신들의 인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선처와 관심을 요청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 원고를 쓰는 동안, 109번에 계시는 어르신들의 부상과 실신 소식이 들려오는 먹먹한 밤이다.

▲ 경찰의 야만적 폭력을 고발하는 어르신들 ⓒ장영식
▲ 109번 공사 현장 밖에서는 상동면과 산외면 어르신들이 공사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농성 중이었다. ⓒ장영식
▲ 부딪히고 또 부딪혀도 돌아오는 것은 서러움 뿐이었다. 원통함 뿐이었다. ⓒ장영식
▲ 109번 현장의 어르신들은 주먹밥 한 봉지로 허기를 달래며 싸우고 계셨다. ⓒ장영식
▲ 눈물로 호소하는 어르신들의 간절함이 발길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장영식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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