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6

38 그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의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악하고 간음하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40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낮과 밤으로 사흘을 지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땅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보낼 것입니다. 41 심판 날이 오면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시오,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42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 여왕도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시오,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43 그러나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있다가 나와 쉴 곳을 찾아 사막을 헤맸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44 그러자 그는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다시 돌아가 보니 그 집이 비어 있고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45 그래서 그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 잡고 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됩니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마태 12,38-45)

바리사이파는 12장 전체에서 예수의 반대자로 등장한다. 율법학자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태오는 설명하지 않는다. 말 못하는 장님을 치유한 사건을 사탄의 행위라고 비난한 그들은 예수의 신분을 확실히 보여줄 결정적인 표징을 요구한다(마태 16,1). 그런 요구는 예언자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신명 13,1-; 1사무 10,1-; 1열왕 13,3).

예언자라면 그러한 표징을 반드시 보여야 한다고 랍비들은 말한다. 오늘 단락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 정당한 요구를 한 것이다. 표징은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이집트 탈출과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위를 가리킨다. 표징은 이적(異蹟)이 될 수 있으나, 이적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예수의 답변에 요나서 2,1 부분이 단어 그대로 인용되었다. 이 세대(genea)가 예수 시대 사람을 가리키는지 유다인 전부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악한(poneros)’이라는 단어에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최후 심판을 의식하였다(마태 7,17-; 12,34-). ‘간음(moikalis)’이란 표현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일치가 깨진 모습을 나타내는 상징한다(호세 3,1; 에제 16,38).

▲ <최후의 심판>, 바이덴, 1450년

사흘은 유다교에서 상징적인 숫자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을 사흘 이상 곤경에 처하게 놓아두시지 않는다(창세 42,17-; 탈출 19,11.16; 호세 6,2). 요나는 그 운명에서 예수를 미리 보여준다고 마태오는 강조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이 세대에 보여주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요나 표징의 원래 뜻을 알기는 어렵다. 회개하라는 설교를 가리키는가? 설교를 표징으로 보기란 어렵다. 요나가 구출된 사건 자체를 가리킬까? 아니면 예언자 요나 자신을 가리킬까? 공동성서(구약성서)적으로 보면 예언자 자신이 표징일 수 있다(이사 8,18; 에제 12,6).

사람의 아들을 마태오는 심판 날과 연결시킨다. 그때 니네베 사람들은 부활하여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의로운 사람들은 하느님의 부탁으로, 또는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한다(다니 7,22).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남쪽나라 여왕 이야기(1열왕 10,1-13)가 두 번째 사례로 언급된다. 솔로몬은 온갖 지혜를 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하였다. 그 지혜를 알려고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 온 여왕도 있지만,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 따로 있다고 마태오는 강조한다(마태 11,28-30). 예수는 두 번씩이나 이방인―니네베 사람들과 남쪽 나라 여왕―을 예로 든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이방인 선교를 마태오가 생각하는 것이다.

스바 여왕을 이방인교회로, 솔로몬을 그리스도로 비유(allegorie)하는 초대교회의 해석도 있었다. 성서 해석에서 비유는 적용 폭이 아주 넓어서 자칫 위험한 상상을 덧붙일 수 있다. 성서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 특히 근본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 바로 비유적 해설이다. 대부분의 설교에서 흔히 보이는 비유적 해석은 이제는 가능하면 삼가는 편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으른 설교자는 비유적 해설을 도피처로 삼지 말고 성서주석서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옳다. 모르면 나오는 말이 거창해지고, 알면 더 차분해진다. 공부하지 않는 설교자는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43절 이하, 마지막 부분은 현대인에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명이다. 병이 재발하면 처음 병날 때보다 더 악화된다는 경험을 예수는 당시 귀신 관념을 빌어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목적은 뚜렷하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하면 그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앞에서 이적도 행하고 표징도 이미 보였는데 무엇을 더 요구하느냐는 말이다. 남은 것은 예수 앞에서 자신의 결심이다. 사랑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 배우자는 이미 있는 사랑을 아는 것일까.

오늘 단락에서 그리스도교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첫째, 요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교는 회개해야 한다. 누구나 회개해야 하지만 특히 성직자와 목회자가 회개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성직자에게서 비롯된 위기다. 설교자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라.

둘째, 신앙에는 어떤 보증도 없다. 세례도, 서품도, 교회 내 직책도 그 신앙을 보증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신앙을 위해 평생 애써야 한다.

셋째, 지금 그리스도교로부터 비난받는 사람들이 심판 날에 하느님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심판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비판하는 논리가 오히려 우리를 심판하는 근거로 적용될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에게 비판받은 사람들 자리에 그리스도교를 대입하면 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자리에 목사와 신부를 넣으면 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자리에 나 자신을 넣으면 된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회개하기에도 바쁜 신세다.

넷째,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교회가 행동해야 한다. 전해주는 사람의 언행에 실망하여 전해지는 분을 알기도 싫어하게 된다면 누구 책임일까. 그리스도교 탓에 사람들이 예수를 알기 꺼려한다면 누구 책임인가. 남미 선교사들의 행태를 보고 원주민들이 성서를 불태운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작 성서를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은 성서를 모르던 원주민이 아니라 성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선교사였다. 우리 시대라고 얼마나 다를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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