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5

22 그때 사람들은 마귀가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자 그는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23 그러자 모든 군중이 깜짝 놀라며 “이 사람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 하고 수군거렸다. 24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는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고 헐뜯었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하지 못합니다. 26 그러므로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그 나라는 이미 갈라진 것입니다. 그래서야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27 또 내가 여러분 말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면, 여러분의 사람들은 누구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바로 그 사람들이 여러분 말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할 것입니다. 28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29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재산을 빼앗아 가려면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 집을 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30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입니다.

31 그러므로 잘 들으십시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32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33 좋은 열매를 얻으려거든 좋은 나무를 그리십시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34 이 독사의 족속들이여,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35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6 잘 들으시오.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37 여러분이 한 말에 따라 여러분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정받게도 될 것입니다.” (마태 12,22-37)

▲ ‘그리스도가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내쫓다’, 도레(1865년)
예수, 바리사이파, 군중, 세 그룹이 등장하는 귀신 추방 이야기(22-24)가 먼저 소개된다. 예수의 행동에 대해 군중과 바리사이의 반응이 다르다. 예수는 분열된 나라와 집안을 소재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해명한다(25-30). 성령 모독죄에 대한 설명(31-32)에 이어 열매와 언어를 빌어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33-37). 다양한 주제의 짧은 구절을 마태오는 한 데 묶은 것이다. 문장부호도 없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은 성서 본문을 참조하면서 편집하는 마태오의 모습이 떠오른다.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는 우리에 비해 마태오는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눈먼 자의 치유(마태 9,27; 20,30-; 15,22)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마태오는 자주 강조한다. 군중은 예수를 호의적으로 관망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깎아내린다. 예수에 대한 지배층의 생각과 군중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

“베엘제불”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널리 알려지던 마귀 두목이다. 예수의 이적(異蹟) 행위가 갈릴래아 지방에서 큰 호응을 일으켰음을 전제한다. 마귀는 한 나라를 구성하고 사탄이 그 두목이라는 당시 통념을 전제로 예수는 자신을 변호한다. 어느 나라나 동네나 집안이 갈라져 싸운다면 망한다는 25절 말씀은 분단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과 독일, 한반도, 내전의 아픔을 겪은 한반도와 엘살바도르, 분열된 그리스도교에게 남달리 들리겠다. 여전히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분열된 인류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준다. 내전의 역사가 있는 한국과 엘살바도르, 민족 분열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분열의 본산지인 독일에서 살아본 나는 무엇을 보고 배웠나.

31절 성령 모독죄는 대체 무슨 뜻일까. 교회사에서 갖가지 연상을 불러일으킨 구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고 고백하였다.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사람의 아들’을 대조시킨 구절은 해석하기 또 어렵다. 하느님의 은총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 죄의 분류, 지옥 형벌, 연옥 문제, 뉘우침의 가능성, 성령 모독죄를 신학에서 다루는 근거가 된 31절이다. 31절 하나만 다루어도 책을 몇 권 쓸 것이다.

성서에서 연상 범위가 넓은 단어를 만나면 그 뜻을 확정하지 말고 조심스레 처신하는 것이 실수를 줄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단어를 함부로 적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단’, ‘성령 모독죄’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시라. 성령 모독죄 구절에서 파생된 무수한 해설 탓에 많은 경건한 신자들이 자신을 탓하며 가슴 졸이며 살았다. 성령 모독죄 논의는 지금 교의신학(조직신학)에서 다행히도 거의 사라졌다.

교회 역사에서 성령 모독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었는데, 서로 뒤섞여 해설되기도 했다.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사람들, 비그리스도인, 유다인, 이단자를 가리킨다(Athanasius). 그리스도교 신자들만 범할 수 있는 죄로 해설하기도 했다(Origenes). 신앙을 버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은 대부분 이 입장을 따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이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 당시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마태오 복음서 본문에는 첫째 해설이 가장 가깝겠다.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마태오가 보도하는 바리사이파의 모습과 실제 바리사이파 모습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곳이 있다. 둘째,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당화하고 다른 종파를 비난하는 구절로 이 구절이 악용된 역사가 있다.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남을 비난한다고 해서 자신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34절 “독사의 족속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같이 쓰던 욕설이다. 당시 널리 유행하던 말일까?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곧바로 “독사의 족속들이여”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여.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아무리 예수의 말씀이라지만 우리가 그런 욕설을 배울 필요는 없다. 욕설 잘하는 어느 종교인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추태를 변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이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떠오른다. ‘정확하게, 아름답게 말하라.’ 살다보면 욕설이 당연한 상황이 무수히 많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욕설을 참는 것이 좋겠다. 욕설은 욕설하는 사람의 마음을 우선 황폐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말만 하고 살아도 그저 짧은 우리 인생 아닌가.

36절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할 것”을 나는 엉터리 설교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엉터리 설교를 하려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일방통행식 설교에서 함부로 지껄인 설교 탓에 남몰래 고통 받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식한 설교자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 무식은 죄를 낳기도 한다.

모르는 주제는 아예 언급하지 말고 자신 없는 주제는 언급을 줄이는 것이 낫다. 아무 발언권도 없이 다소곳이 앉아있는 저 신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이런 말을 했다. “마이크 잡고 말하는 내가 듣는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는지, 듣는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저를 가르치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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