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300년이 되지 못하고 개신교는 이보다 짧다. 수천년 민족사 가운데 짧은 세월에 그리스도교는 급격히 성장했고 학교와 병원과 각종 시설도 많이 지었다. 세계적 기록이다. 그리고 정말 빠르게 외형적 고속성장의 시대가 끝났다. 갑작스런 정체기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리스도교는 아직 믿을 만한 종교인가. 나는 교회에 계속 나가야 하는가.

잠시 돌아보자. 워낙에 빨리 흥했기 때문인지, 이 땅에 ‘그리스도교 문화’는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많고 교회 건물은 웅장한데, 정작 예수의 제자가 일으켰음직한 ‘문화적 변화’를 삶에서 체험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가톨릭 교세가 높은 강남 지역 사람들이 더 양심적이고 더 겸손하고 더 나눔에 적극적이라고 체험되는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주위에 늘어나면 내 삶에 거룩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좋은 일이 생기던가. 교회는 지연, 혈연, 학연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공동체이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는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배타적 친분을 쌓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아닌가.

사람에 비유하자면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청소년기다. 몸은 다 자랐는데 내면이 성장하지 못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고속성장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게 정체기는 답답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양적 성장의 문화는 빨리 포기해야 한다. 구호보다는 성찰, 확성기보다는 남모르게 하는 실천에 앞장서야 할 때다. 이 점에서 필자는 고속성장이 끝난 이 시기가 별로 아쉽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 체득한 내면적 태도가 걱정이다. 일부 신자들과 대화해 보면 과거 고속성장 시기의 ‘상식’이 아직 굳건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를테면 각종 ‘사업’ 때문에 교회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실제로 믿는 분들이 많다. 교회는 성전 건축이든 성지 개발이든 대규모 군중동원이든 여러가지 ‘사업’을 잘 치렀기 때문에 성장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을 벌여야 유지되는 곳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성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신도는 현재 교회에서 벌이는 각종 사업에 충실히 참여할 때 진정으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사업을 잘 치르면 사람들이 과연 ‘믿을 만한 종교’라고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이런 사업 중심의 태도는 정체기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고속성장 시대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앞으로 교회에 필요한 것은 복음적 실천과 언행일치다. 외부에서 기대하는 모습과 실제로 체험되는 모습이 서로 일치해야만 비로소 교회는 믿을 만한 곳으로 유지될 것이다. 그 반대라면 믿을 만한 곳이 못 된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이 기도하고 사랑하면서 더 나은 복음적 실천을 겸손되이 모색하는 곳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애쓰는 교회, 스스로 가난해지는 교회, 겸손과 덕성과 자선을 고양하는 교회를 삶에서 실제로 체험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이웃 신자가 삶에서 보여주는 선행과 덕성을 보고 사람들은 믿을 만한 종교를 선택할 것이다. 교회는 평신도의 삶과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큰 건물이나 시설물을 더 고속으로 늘려야 할까. 크고 화려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행사가 도움 되는 시대는 저물지 않았나. 교회를 긍정할 수 있는 사회적 체험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눈앞의 정체기는 급격한 쇠퇴기로 이어질 것 같다. 빨리 데워진 쇠가 빨리 식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가톨릭 학생회를 거쳐 평신도 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하고, 현재 그리스도교 원천 문헌 번역에 힘쓰는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며 서강대 종교학과와 신학대학원에 출강한다. 히브리 성경과 고대 근동 문헌을 읽으며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종교들> 번역에 참여했고, <구약성경과 신들>, <우가릿어 문법>, <우가릿어 사전>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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