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30]

▲ ‘겐트의 제단화’에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 휴베르트 반 아이크(1432년)
믿을 교리가 있고 지킬 계명이 있으며 은총을 얻는 방법이 있다는 과거 교리서의 분류는 유럽 중세 봉건사회의 발상이었다. 그 사회는 고딕식 사고를 하였다. 모두 위를 쳐다보고 사는 세상이었다. 윗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윗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의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 윗사람을 인정해야 한다.

믿을 교리는 윗사람을 인정하듯이 하느님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인정하는 것은 그 윗사람이 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군주(君主)의 미움은 죽음이다.’ 그래서 지킬 계명이 있다. 그 윗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더 큰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처신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은총을 얻는 방법에 해당한다. 윗사람에게는 위로부터 부여된 권위가 있고 나는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회에 살지 않는다.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라 국민이다. 옛날에는 내가 하는 일의 실효성은 권위 있는 사람에게 순종함으로써 발생하였지만, 오늘은 각자가 지닌 횡적 유대에서 일의 실효성이 보장된다.

우리는 다원사회(多元社會)에서 정보의 홍수 안에 살아간다. 권위(權威)는 위에서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획득하는 것이다. 권위는 순종을 부르지 않고, 사람들의 인정을 부른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새로워져야 한다. 주어진 계명을 지키고 은총을 얻기 위해 어떤 수작을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리를 원초적인 것으로 가지고 있다. 바울로 사도가 채집하여 전해 준 초창기 교회의 ‘그리스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였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필리 2,6-7).

이 사실을 요한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 그분은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였다”(요한 1,14)고 말한다. 은총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진리는 그 베푸심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있다.

* 죠지 베르나노스(G.Bernanos)의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공작 부인이 본당 신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다. “하느님이 없는 어느 한 구석에 아들과 함께 있고 싶다.” 신부의 대답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부인이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아들이 또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눔은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나눔은 있다. 그 동기는 인정 때문일 수도 있고, 체면 혹은 이해타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김’, 곧 하느님의 은혜로우심 혹은 은총을 연장하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한 자캐오(루카 9,1-10)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눈다. 예수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고 말씀하신다.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는 하느님의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 말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넘어서는 베푸심이다. ‘탈란트의 비유’(마태 25,14-30)는 베푸신 하느님 앞에 사람도 어떤 베풂의 노력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한다. 주어진 탈란트를 자기 자신을 위해 사장(死藏)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가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 아버지는 이 세상과 대조적인 분이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극복하려 한다.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기원전 1728~1686) 법전의 기조(基調)를 이루는 것이 동태복수(同態復讐)의 원칙이다.

인류 역사 안에는 증오의 악순환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선하셔서 베푸신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베푸심을 알았더라면 …”(요한 4,10)하고 말씀하신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대답한다(마태 22,34-40). 율사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 생각하는 율법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심으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도 베풀고 나누면서 그분의 자유를 사는 그분의 자녀가 된다. 복음 안에 예수가 ‘불쌍히 여기신다, 가련히 여기신다, 측은히 여기신다’는 말들은 무수히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이 인간, 특히 약자도 할 수 있는 일이라서 그 말에 유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초과(超過)하는 일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 하면서 하느님을 우리의 생활권에서 추방한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 5,44-45)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 신앙언어 안에서 베푸심이라는 주제는 은폐되고 바침의 언어들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을 일반 종교가 말하는 신(神)으로 전락시키는 비극이다. 우리에게는 인과응보가 더 미더운 것이다. 바치고 저축한 그만큼 받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서 상상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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