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3

9 예수께서 다른 데로 가셔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10 거기에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11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그러므로 안식일에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13 그리고 나서 그 불구자에게 “손을 펴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다른 손과 같이 성해졌다. 14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모의하였다. (마태 12,9-14)

▲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뜯다’, 도레
안식일이란 주제로 예수와 바리사이의 논쟁이 계속된다. 마르코 복음서 3,1-6을 크게 줄인 단락이다. 치유 이야기는 논쟁을 도입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죽일 생각을 하였다고 보도된다. 실제로 바리사이는 예수의 죽음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14절에서 헤로데 당원들을 마태오는 삭제하였다. 마태오 공동체에 그들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무의미한 그룹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스라엘 지배층 세력에게 예수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오늘 등장하는 예수의 상대자는 당시 바리사이 중에도 엄격한 샴마이 그룹인 것 같다. 바리사이 힐렐 학파는 예수의 입장에 아주 가깝다.

“그들의 회당”이란 표현에 초대교회와 유다교의 벌어진 서먹함이 담겨 있다. 마태오 공동체는 더 이상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고 슬펐을까. 유다교 개혁파의 일부로 취급되던 초대교회는 차차 유다교에서 분리된다. 예수는 이런 역사적 전개과정을 어떻게 보실까. 서방 그리스도교가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분열된 역사도 슬프지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열도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슬픔이다. 분열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고 분열을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 종교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인가.

마태오 복음서의 논쟁 이야기에서 흔히 그렇듯, 예수 반대자의 입장은 오늘 단락에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 않다. 복음서 저자가 마땅히 설명해야 했다. 토론 규칙을 잘 지키지 않고 논쟁을 소개하는 마태오다. 학술 토론에서든 페이스북 댓글에서든 토론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를 나는 드물게 본다. 자기 의견의 타당성을 증가시키려 애쓰기보다 상대 의견의 허점을 파고들기에 대부분 바쁜 듯하다. 토론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인데도 말이다.

유배 시대 이후 안식일은 유다인에게 마치 존재 의미처럼 되었다.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유다인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주어야 한다. 양 이야기는 안식일 의무에 대한 토론에서 랍비들이 흔히 다루던 소재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꺼내지 않도록 에세느파는 주장한다(다마스커스 문헌 11,13-). 후대 랍비들은 그런 의견을 지나치다고 여겨서 다른 묘안을 짜냈다. 깔개 등으로 양을 돕지만 양 스스로 구덩이에서 나와야 한다.

예수는 그런 절충안을 거론하지 않고 일반적인 원칙을 묻는다. 에세느파 또는 랍비들에게 영향 받지 않는 갈릴래아 농부들을 예수는 주목한다.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농부의 예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나탄을 연상시킨다(2사무 12,3).

생명의 위험이 있을 때 안식일에 금지된 음식을 치료수단으로 쓰는 예외도 유다교에서 있었다. 그러나 랍비들에게 예외적인 경우가 마태오 공동체에게 표준이 되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그래서 오늘 단락의 결론은 12절이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구출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양보다 더 귀한 인간을 돕는 것은 마땅하다. 자비는 희생제물이나 안식일 의무보다 더 소중하다고 예수는 가르친다(마태 22,40; 23,23).

일요일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본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느님을 생각하고 인간을 배려하라는 것이다. 어디 일요일뿐일까. 휴식은 노동을 위한 단순한 준비가 아니다. 안식일에 가족과 지내며 인생의 목적을 돌아보는 유다인의 습관이 참 부럽다.

오늘의 단락에서 동물에 대한 보호를 주제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바리사이들은 욕심 때문에 안식일에 양을 건진다는 반(反)유다적 해설도 있었다. 예로니모, 알베르토,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등 교회사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그 목록에 등장한다. 13절 ‘오그라진 손’은 유다교에서 치유될 수 없는 ‘죄’로 중세에 해설되기도 했다. 성서신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가 낳은 안타까운 사례다. 우리도 후대 성서학자들에게 또 얼마나 비판받아야 할까.

창조주를 생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안식일의 근본 취지를 예수는 오늘의 단락에서 상기시킨다.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종교행위를 분별하라는 말씀이다.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위도 예수의 눈으로 보아야 하겠다. 갈릴래아 시골의 가난한 농부에 대한 예수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일제시대 전라도 정읍에 사는 어느 가난한 농부의 소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다고 상상할까.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 참 종교심이다. 가난한 사람을 경제적 관점으로 보지 말고 신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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