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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사랑하는 딸 선희에게

선희야, 아침 일찍 찾아왔던 두통은 조금 나아졌니? 밤새 편안한 잠자리를 갖지 못한 듯 해쓱한 너의 얼굴에 아빠의 마음이 많이 아팠다. 늘 그랬듯 네 머리 위에 아빠의 손을 얹어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는 우리의 일상이 오늘따라 참 간절하구나.

아마도 너의 두통은 지난 밤 늦게까지 대입진로문제로 고민한 끝에 찾아온 것이겠지. 너와 네 또래들의 고민과 심리적 부담이 얼마나 클 것인지, 아빠는 그저 아빠의 위치에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구나. 올해 수능 결과가 발표된 다음 날 새벽 4시, 창원의 한 아파트에서는 쌍둥이 자매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25층이었다지. 아이들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동이 튼 후였고, 아파트 길목에서는 12명의 대선 출마자 선거 운동원들이 확성기를 통해 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빠한테는 그 악다구니가 마치 “나를 뽑아라. 그러면 더 비싸고, 더 높은 아파트에서 몸을 날리게 해 주겠다”는 듯 들렸다. 아빠의 몹쓸 환청이겠지?

선희야, ‘권불십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며, 월만즉휴(月滿卽虧)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인생무상’이란 뜻으로 곧잘 쓰곤 한단다. 한마디로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 그런가하면 구약성서 저술가들은 하느님의 역사개입을 아주 독특한 시각으로 후대인들에게 전해준단다. 출애굽의 의미를 잊은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거듭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를 하시고, 그래도 못 알아듣는 그들에게 누군가를 보내셨다. 때로는 이민족이 될 수도, 때로는 전혀 아닌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누군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의 정화’,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너도 구약성서 중에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해가는 과정을 비롯한 역사서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는 늘 반복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나쁜 반복을 하지 않기 위함이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역사라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닌 학생들에게는 암기의 대상이요, 어른들에게는 망각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희야, 반복되는 역사는 때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단다. 6․10항쟁 20주년을 기리는 목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때와 똑같은 분열의 모습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 때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 이루어냈던, 6․10항쟁의 결과물 중 하나였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놓고는 죽 쒀서 남 주는 일을 서슴없이 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멍충이들의 뻘밭짓을 20년 만에 ‘한 번 더!’ 외치고 있단다. 당연히 당사자들로서는 “우린 그 때 사람들과 상황이 다르다”고 하겠지만 언제나 이 나라 정치권의 히트송은 그래서 ‘그 때 그 사람’이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보내려고 하지 않겠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역사개입을 “안돼요” 할 수도 없는 것이고, 헤아릴 눈이 있는 사람은 헤아려야 하지만 12명의 대선 후보 중 많은 수가 종교인임에도 신앙인은 없다는 것에 하늘이 더 두려울 뿐이다.

선희야, 너의 두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번에는 네가 간발의 차이로 선거를 할 수는 없지만 5년 후에는 당당한 유권자 되는구나. 네가 성인이 되는 시기에 이토록 복잡한 나라를 만나게 해서 미안하다. 하기는 늘 이 나라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단다. 관전하기 좋아하는 이방인들의 눈에는 이런 우리의 현실을 ‘역동성이 넘치는 나라’라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들쥐 떼’ 같다고 말하는 외국 군인도 있었다. 100년 후를 예측할 미래학자는 있지만 한국역사 특별히 한국정치 1년 후를 예측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래서 ‘역시 한국사회!’라는 표현도 한다.

선희야, ‘경제 살리기’라는 12명의 대선후보가 사용하는 주문(呪文)이 우리를 풀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세계 밀가루 가격 인상에 따라, 라면값 50원 오르는 것을 30% 오른다고 부추기는 언론의 기술(欺術)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지 않기를 바란다.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자처하는 후보자들에게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환담하고 덕담해주는 종교직업인들이 우리마저 가르치려 들지 않기를 바란다. 교육정책을 말하는 후보들의 말로, 꿩 잡는 이야기가 너와 네 친구들을 실험실의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도덕을 가르치면서 도덕으로 생활하면 바보라고 흉보고,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고 피노키오 읽을 때 말해놓고는 일류대학 나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버젓이 해서 미안하다. 고약한 사람들이다. 상상할 수 없는 부의 축적자들이 길거리에서 순대 먹고, 풀빵 먹고, 국밥집에서 어쩌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미안하단다. 그들의 직업이 연기니 네가 이해하여라.

선희야, 세상은 정치인과 언론인과 종교인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뿌린 대로 이루어진다. 아빠와 같이 본 ‘미션’이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니? 불타버린 십자가를 손에 들고서 작은 배를 탄 채 아마존강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던 과라니 부족 어린 아이들의 눈을 기억하자. 아직은 끝이 아니니……

/김유철 200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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