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4]

▲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에드가 드가(1869)
오페라의 아리아로 입문하여, 실내악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라는 통설도 있지만,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곡도 다소 짧고 덜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 소품이 듣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클래식 음악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여러 악기들로 구성되고 스케일도 크며 연주 시간도 긴 협주곡이나 교향곡을 좋아할 수 있고, 이후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형식을 갖춘 실내악곡이나, 줄거리와 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악과 성악이 어우러진 오페라를 좋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바흐, 헨델 등이 쓴 바로크 음악을 좋아하게 될 수 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형식의 곡을 얼마간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좋아하게 되는 과정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 과정을 반복하기도 하는데, 그때서부터 사람들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음악을 듣곤 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의 유형이 나름대로 정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예를 들면 오페라의 경우, 초기에는 대체로 모차르트나 로시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쾌하고 해학적이라서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베르디의 오페라를 좋아해서 반복해서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르디의 작품은 극적 구성도 탄탄하고 곡의 흐름도 때로 속삭이는 듯, 또 때로는 격렬하게 급변하는 등,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바그너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장중한 느낌을 줍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환상에 젖게 만듭니다.

한 음악가의 곡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작곡했지만,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 할지라도 그가 작곡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합니다. 그러한 것이 음악가가 가진 개성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리고 같은 관현악곡이라고 하더라도, 그 곡을 지휘한 사람이나 오케스트라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받곤 합니다. 예컨대 자주 연주되고 있는 음악가의 교향곡을 들을 때라도 지휘자의 곡 해석이나 악기의 편성, 그리고 연주에 소요된 시간에 따라 곡이 주는 느낌은 다릅니다.

실험적으로 악보를 펴놓고 녹음된 곡을 반복해서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와는 달리 지휘자에 따라 곡의 해석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작곡가가 악보 상에, 연주할 때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표기해놓고 있어도, 지휘자가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현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연주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유기적인 의미나 내용을 갖는 자연스러운 악구(樂句)로 음악의 흐름을 구분하는 일을 프레이징(phrasing)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프레이징을 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음악이 주는 감동도 달라집니다.

이처럼 어떠한 형식의 음악이든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는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연주회장 같은 곳에서는 반복해서 들으며 악보와 대조해 볼 수 없으니, 일반인들은 한번 듣고 나서 지휘자나 연주가가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재현했는지 잘 알 수 없는 것이 음악이 가진,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속성일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음악의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부정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음악의 시간성’에 대해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는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은 ‘음악의 시간성을 통해 음악이 인간의 내면에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대상과 나의 경계를 허무는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서양 음악이 그리스도교의 바탕 위에서 생성되고 발전해 왔지만,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음악의 속성은 오히려 고대 인도의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음악의 시간성은 없던 것에서 생겨나고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니,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지는 것처럼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일 것입니다. 또, 차별의 법으로 보지 않고 평등의 법으로 보았을 때 대상과 내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헤겔이 말한 음악의 시간성이라면 음악은 매우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헤겔은 음악의 속성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성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측면[正]에서 출발하여 그와 반대되는 긍정적인 측면[反]을 상정하였고, 그 둘을 하나로 묶다보니[合] 변증법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수 있겠지요.

지휘자가 악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음악적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청중들이 음악을 들을 때 받는 느낌은 다릅니다. 즉 지휘자가 ‘작곡가의 의도는 악보에 모두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표현하는 음악은 달라집니다.

이처럼 악보를 해석하고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문제는 비단 지휘자뿐만 아니라 연주자, 성악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작곡가의 의도와 악보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워나갈 것인가에 대해, 음악가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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