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2

1 그 무렵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저것 보십시오.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3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은 다윗 일행이 굶주렸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4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사제들 외에 다윗도 그 일행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습니다. 5 또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는 사제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겨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 책에서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6 잘 들으시오. 성전보다 더 큰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내게 동물을 죽여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여러분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이라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8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마태 12,1-8)

▲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뜯다’, 도레
마태오 복음서 11,25-30부터 바리사이파는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 제자들은 어린이 같은 사람(nepios)에 속한다. 1절에서 제자들의 배고픔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일부러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 배고파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잘 차린 음식이 필수라는 것을 마태오 복음서 독자들은 이미 안다. 유다인은 식사와 술과 토라(모세오경) 공부로 안식일을 ‘기쁘게’ 지내야 한다. 좋은 옷 또한 안식일에 의무사항이다. 안식일에 단식은 금지되며 회당 예배 참석은 의무는 아니다. 이삭을 거두는 행동은 안식일에 금지되었다.

배고픔은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 랍비들은 여겼다. 생명이 위험한 경우 안식일 의무를 어겨도 좋다. 마카베오 시대부터 실제로 실행된 것 같고 주로 날품팔이 유다인에게 적용되었다. 가난한 유다인은 지금도 많다.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에게 추궁한다. 제자의 잘못은 스승이 책임지는 법이다. 예수의 답변은 다윗 일화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1사무 21,1-7). 그 단락은 안식일에 대해 말하고 있진 않다. 레위기 24,8이 제단의 빵에 대해 말하고 있다. 후에 랍비들은 다윗의 행동을 옹호하였다. 예수도 랍비들처럼 제자들을 변호한다.

예수의 둘째 답변은 안식일 제사가 안식일 의무를 어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에 연관된 사건이 안식일 의무를 어길 수 있다고 랍비들은 생각하였다. 할례, 성전 제사, 파스카 축제 등이 안식일과 겹치면 안식일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성전 제사 때문에 안식일 의무를 어겨도 된다면, 배고픔 때문에 안식일 의무를 어기는 행위를 훨씬 더 자비롭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주장이다.

세 번째 답변은 안식일의 주인에 대한 예수의 언급이다. 여기서 예수가 자기 자신이나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성전보다 큰 사람인지 문맥상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유다 전쟁으로 마태오 시대에 이미 파괴된 상태다. 즉, 마태오는 성전을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마태오에게 자비는 성전 제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다(마태 5,17; 9,13). 예수는 호세아서 6,6을 인용하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것이다. ‘당신네 바리사이들은 내 제자들보다 성서를 더 잘 알지 않느냐. 성서에 자비가 이미 나오지 않느냐. 그렇다면 당신들이 제자들 행위를 자비롭게 보아야 하지 않느냐. 성서 공부를 제대로 하라.’

공동성서(구약성서)도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종들을 위한 안식일 의무를 강조한다(신명 5,14-). 마태오 공동체도 안식일을 지킨 것 같다. 안식일 의무보다 자비의 의무를 그 어떤 유다교 그룹보다도 더 강조했다. 안식일 의무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가 마태오 공동체의 최고 지침이다. 바리사이 개혁파인 힐렐 학파와 비슷한 태도다. 힐렐 학파는 안식일에 병자 방문을 허용하였다.

오늘의 단락은 그리스도교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예수 시대에 적용되는 구절이고 부활 후 그리스도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교와 달리 안식일에서 휴식이 아니라 예배를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대교회에서 안식일 이해는 마태오 복음서 12장을 비롯한 복음서가 아니라 콜로새서 2,16-, 히브리서 3,7-4,11에서 더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도교는 안식일 의무를 없애고 대신 일요일 의무를 새로 만들었다. 일요일 노동 금지는 교회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일요일 노동 금지를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주저하며 따르게 된다.

다윗이 성전 질서를 무너뜨렸다느니, 사제는 성전에서 안식일 의무를 어길 권리를 갖는다느니 하는 주장은 오늘의 본문과 무관한 과장된 해설이다. 성직자의 무한 권리를 가르치는 단락도 아니다. 위급한 경우에 성당의 전례도구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배려하도록 가톨릭교회는 가르친다. 예수는 안식일 의무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의무를 자비라는 최고 기준에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강력한 종교비판을 담고 있다. 예수가 바리사이에게 하던 비판을 이제 그리스도교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는 전례(성례전)의 제1 기준은 어떤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의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잘 연결되는가. 미사와 예배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존중하는가. 전례의 의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의무는 지금보다 훨씬 커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전례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오늘의 본문은 또한 종교인과 성서학자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성서 공부를 제대로 하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성서 전문가지만 삶에서 자비로움을 실천하지 못하는 성서학자에게 그 존재 의미가 있을까. 성서학자는 그 글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삶으로 드디어 평가된다.

오늘의 단락을 읽는 유다교 신자는 불쾌한 느낌을 가지겠다.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는 사람들 곁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돋보이려고 바리사이파를 무시하는 글을 쓴 마태오를 그들은 섭섭하게 생각하겠다. 바리사이의 입장을 마태오는 소개하고 있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마태오 공동체의 주장만 소개하고 있다.

마태오가 공정한 토론 규칙을 지키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예수를 내세우기 위해 유다교를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마태오가 그런 점까지 세심하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성서를 읽는 우리도 그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상에서도 좋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꾸며내는 비유에서 종종 뜻하지 않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성서 저자들이 숨기지 않고 있는 반(反)유다인 감정을 우리가 상속할 필요는 없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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