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루카 16,19-31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사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 하였지만, 그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은 종기를 핥기 위해 모여드는 개들뿐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으로 가고, 부자는 땅에 묻혀서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곁에 있다는 말은 죽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그 시대 유대인들의 표현입니다. 부자가 땅에 묻히고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말도 그 시대 유대인들이 상상하던 죽음 후의 불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이 죽음의 세계는 고성소 혹은 저승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재물을 지니고 호사스럽게 산다는 그 자체가 결정적 행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지고 호화롭게 살아서 행복하였습니다. 그는 재물이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는 자기 집 문 앞에 있는 가난한 라자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자로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가난한 사람은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본인이 게을러서 가난할 수도 있고, 오늘 라자로와 같이 몸이 불편해서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이북의 동포들 같이 잘못된 지도자 동무를 만나서 굶주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세상의 불공평을 인간이 서로 돌보아주고 나누는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이웃에 대해 유대감을 지니고,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어서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서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사람,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사람,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을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고도 말합니다. 중국의 고전(古典)인 채근담(採根譚)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 많은 사람을 가난에서 구하려 하지만, 가진 자는 그 가진 바를 뽐내고 갖지 못한 이를 깔보니 하늘이 노할 것이다.”

오늘 이야기의 부자는 가난한 이웃인 라자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지적하는 비극입니다. 인간이 이웃과 유대감을 느끼면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만 주어지면 우리 자신을 사람들과 대립시켜 생각하면서, 인류와의 유대감을 외면하고 이웃을 비난하면서, 이웃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안에 지속되는 비극입니다. 루카 복음서(16,15)는 말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높은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

19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기술문명의 혜택으로 인간의 생산성이 높아졌을 때, 유럽의 지성인들은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리스도 신앙이 해결하지 못한 지구상의 가난을 이제 기술문명이 해결해 줄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드디어 가난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또 풍요롭게 사는 세상이 온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사람들은 모두가 그 혜택을 공평하게 누릴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사랑으로 인류가 평등하게 될 것을 가르치는 그리스도 신앙은 필요 없는 것이 되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들은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도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산성이 증대되면서 빈부(貧富)의 격차는 더 심해졌습니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되었습니다.

기술문명과 더불어 나타난 공산주의는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게 하면, 인간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는 실험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70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실험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사라지고, 모두가 가난 안에 공평하게 억눌려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북한 정권이, 권력을 부자간에 세습해가면서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많은 비용을 들여 핵무기까지 개발해서 가졌지만, 인민은 자유를 잃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사람들을 평등하게 살게 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 인간의 삶에서 온전히 사라졌을 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죽음의 나라에서 애원하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로 끝납니다. 부자가 애원한 것은 자기 형제들도 자기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어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그들을 찾아가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부자는 또 애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믿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으로 말미암은 인간 상호간의 유대를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생각되면 인류는 모두 형제자매로 보일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형제자매의 유대를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형제 한 사람과도 유대감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고 축복 받아서 구원 받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그분께 제물을 바쳐서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그리스도 신앙도 아닙니다. 가진 것을 은혜롭게 바라보고, 갖지 못한 이와 그것을 나누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계십니다. 재물, 건강, 시간, 기술, 이 모든 것을 이웃과 나누어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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