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1

25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 외에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 오십시오. 내가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부드럽고 겸손합니다. 29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마태 11,25-30)

▲ ‘베타니아의 예수’,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4년)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토론되는 구절 중 하나인 오늘의 단락은 해석하기 쉽지 않다. 세 부분으로 구성된 단락은 각기 그 청취자가 다르다. 첫 부분(25-)은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찬양, 두 번째 부분(27)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예수의 설명, 그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초대 말씀으로 셋째 부분(28-30)이 이어진다. 이 세대와 갈릴래아 마을에 대한 저주 말씀에 이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위로하는 긍정적인 분위기의 단락이다.

25절은 예수의 답변으로 시작된다. 답변은 유다교 랍비들이 즐겨 쓰는 교육 방법이다. 예수의 기도는 동시에 가르침이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기도는 보통 미래시제 동사로 나타나는데 오늘 예수의 기도에는 현재시제가 쓰였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란 표현은 공동성서에 없다. 공동성서에는 주로 ‘세상의 하느님’이 쓰인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예수 기도의 특징이다. 예수가 가부장적인 취향을 가졌다기보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당시 사회에서 주는 이미지를 채택한 것이다. 하느님을 ‘어머니’라 불러도 된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남성우월주의 풍조는 역사의 예수와 아무 관계없다.

27절은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어 왔다. 초대교회 신학자[敎父]들은 하느님 곁에 예수가 이미 존재한다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27절이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으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는 오늘, 마태오 복음서 11,25-27에 대한 그런 해설은 성서학계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 구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느님을 알려면 먼저 예수를 알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이러이러하다’고 미리 정해놓고 예수를 바라보지 말고, 먼저 예수를 살피고 나서 ‘아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를 깨달으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예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신론에 대한 대중강연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삶 전체가 곧 신론에 대한 강의다. 신관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리스도교를 살피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겠다.

28-30절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다. 예수는 부드럽고 겸손한 분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접촉하였고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분이다. 그런 예수에게 배우라는 초대 말씀이다.

28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세상살이에 헤매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로 요즘 자주 쓰이긴 한다. 그 구절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우선 가리킨다. 십자가라는 멍에는 사실 가볍지 않다. 예수라고 그것을 모를까. 그러나 진정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느끼는 짐이 가볍기만 하다.

지혜로운 사람을 하느님이 뽑지 않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에 예수는 감사드린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 유다교에서 묵시 그룹, 에세느파, 특히 율법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평범한 사람들과 대조되는 특별한 신분과 그룹, 즉 종교귀족을 가리키는 명사로 굳어졌다.

그와 반대되는 단어인 네피오스(nepios)에는 ‘어린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나오는 ‘땅에서 버림받은 사람들’(am ha arez)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여인들, 갈릴래아 사람들, 가난한 시골 사람들 등 시간과 돈이 없어서 유다교 종교지식에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의식하였다. 무식한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고 지식인들은 무식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예수의 감사기도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 어리석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나타나신다. 둘째, 예수는 자신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포함시키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바보라고 했었다. 랍비에게서 번듯한 교육과정도 받지 못하고,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닌 유다교 평신도로 살던 예수다. 예수는 종교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성직자 중심주의를 알지 못하는 분이다. 종교인과 신학자들에게 충격적인 오늘의 말씀이다. 여기서 <슬픈 예수 1>에서 다룬 문제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리스도교에서 지식과 정보의 유통과정을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라너, 바르트 등 1급 신학자가 있다. 그들을 연구하는 독일, 로마, 미국의 신학대학 교수―나라마다 수준 차이가 있지만―를 2급 신학자로 분류하자. 그들에게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온 신학교 교수들을 3급 신학자라 하자. 그들에게 배워 교회와 성당에서 수고하는 목사, 신부를 4급으로 치자. 4급에게 혼나고 사는 우리 신자를 편의상 5급이라 하자.

사실 4급과 1급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2급과 4급은 프로와 아마추어 차이다. 대부분 성직자인 3급, 4급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지식과 정보와 권력을 거의 독점하고 통제하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가 거의 모든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도 큰 문제다. 정보와 권력의 이러한 독점 구조가 바람직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이 성서 공부를 제대로 받을 가능성은 앞으로도 별로 없다.

물론 신심과 신학 지식이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신학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꼭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할까? 오늘 그리스도교의 심각한 문제다. 바울 같은 인물이 오늘의 그리스도교에 등장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

교회 내 부끄러운 풍조인 반(反)지성주의를 선동하는 단락이 아니다. 생각하며 사는 신자들을 성직자들이 면박하기 좋을 구절도 아니다. 지적 노력에 게으른 성직자들에게 주는 알리바이용 말씀도 아니다. 성서 공부와 설교에 게으른 설교자를 두둔하는 말씀도 아니다. 세상의 버림받은 사람에게 먼저 손길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단락이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종교 지배층을 비판하는 말씀이다. 신학자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숙연한 오늘의 말씀이다. 겸손하지 못한 신학자는 아직 신학자가 아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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