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9

“16 그러나 이 세대를 내가 무엇에 비유하겠습니까? 마치 시장터에서 앉아 다른 편을 부르는 어린이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17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우리가 슬퍼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왜냐하면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귀신들렸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19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내는 사람이요 술을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지혜의 일로 옳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마태 11,16-19)

1977년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가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양측 학자들이 공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성서 원전의 성립,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가톨릭의 변화 덕분에 생긴 뜻깊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공동번역 성서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교파가 여전히 대부분이다. 함께 우리말로 옮겨놓고도 서로 다른 번역본을 쓰고 있는 현실이 하느님께 죄송하고 부끄럽다. 다른 교파의 성서연구 성과를 아예 참조하지도 않는 버릇은 더 말해 무엇하랴.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 사이에도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세상 어디를 향해 누구에게 일치를 촉구할 것인가. 예수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못된 고집과 옹졸함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사족-오늘 단락이 성서원전과 가깝게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공동번역 성서에 여러 군데 있어서 조금 당황스럽다.)

예수 정체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예수 답변(11장 2-6절),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생각(11,7-15)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오늘 단락에서 함께 다루어진다. 이런 단락은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 전통에서 유일하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당시 유다인들에 대한 마태오의 불편한 심정이 놀이하는 어린이 비유와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루가 7,31-35를 대본으로 하는 단락이다. 마르코, 루가, 마태오에서 같은 소재를 다루는 대목이 보이면, 언제나 같이 읽고 서로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16절 ‘이 세대’는 공동성서에서 드물게 보이는 표현이다.(예레미아 8,3; 시편 95,10) 이스라엘 백성을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이 표현은(마태오 12,45) 마태오에 여섯 군데 있고 오늘 처음 등장한다. 시장터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자주 모여 교류하는 장소다. 소년 소녀들이 어른 흉내를 내어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는 비유가 소개된다. 음악에 맞추어 둥글게 무리지어 춤추는 것은 유다 결혼식 잔치에서 남자들의 몫이다. 장례식에서 애곡을 선도하는 여인의 가락에 맞추어 우는 일은 여인들의 몫이다. 30센티 길이에 구멍을 여러 개 내어 만든 갈대 피리로 연주되는 소리에 여인들은 루-루-루 하는 슬픈 소리로 운다. 여인들아, 이제 울지 마라. Don't cry for me, Argentina...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 노래를 모르지 않으리.

이 세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따라 오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어린이들을 놀이 주체로 볼 수 있고, 놀이 대상으로 볼 수 있고, 어린이들의 반응을 바라보는 비유로 볼 수도 있다. 세 번째 해석이 좀더 본문 맥락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놀이하는 어린이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아서 놀이 분위기를 망쳤다는 것이다. 결혼식 춤과 장례식 애곡은 서로 반대되는 분위기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는 장례식 분위기를 요구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결혼식 잔치처럼 기쁘게 놀자고 응답한다. 예수가 와서 결혼식 잔치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가 장례식 분위기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세례자 요한을 금욕주의자로 비난하더니 예수를 대식가요 술꾼으로 비난한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한갓 인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급한다는 것이다. 금욕을 제시한 세례자 요한, 자유와 해방을 제시한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거부했다는 뜻이다.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 동족에 대한 마태오의 원망과 안타까움이 섞여있는 오늘 단락이다. 세례자 요한부터 메시아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마태오는 생각한다. 세례자 요한을 예수와 같은 역할로 인정한 마태오의 배려다.

그렇게 애정을 베푼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충격을 예수도 잊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종교지배층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수가 버림받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1. 예수는 덜 정치적이다. 무력투쟁으로 로마군대에 저항하지 않는 예수를 사람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2. 예수는 덜 종교적이다. 예수는 바리사이처럼 경건하지도 않고 에세느파처럼 금욕적이지도 않았다. 독립운동도 하지 않고 별로 종교적이지도 않는 예수에게 어느 유다인이 희망을 걸겠는가. 못된 부류의 인간들과 먹고 퍼마시는 예수를 누군들 이쁘게 보았을까. 그러나 그런 예수를 악의 세력은 정확히 보았다. 예수는 로마군대와 유다교 지배층에게 위험한 인물로 정확히 평가되었다.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을 알아보는데 귀신이다.

먹고 마시는 일로 예수가 비난받은 사실은 가볍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예수가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계율을 자주 위반한 인물로 여겨졌다. 죄인들과 사회적 약자, 역사의 희생자들과 예수가 자주 식사한 모습은 당시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런 예수는 특히 종교지배층 사람들에게 못마땅한 처신이었다. 그런 예수를 따라하는 그리스도교 지배층 사람들은 많은가. ‘대식가요 술꾼’이라는 예수 별명을 듣고 사는 종교인들은 이 나라에 많은가. 대한민국 가톨릭 주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에 몇 번이나 같이 밥 먹고 술 마실까. 귀족 행세하지 말고 서민처럼 사는 종교인들이 많아졌으면 참 좋겠다. 종으로 다짐하고 출발한 그들이니 가난한 삶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당연한 일이 예외로 여겨지는 우리 세태가 슬프다.

겉으로 종교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인지 누구도 모른다. 매일 미사하는 신부나 참여하는 신자가 진실로 종교적인지 누구도 모른다. 하루에 수백번 입에 하나님을 올리는 목사가 진실로 종교적인지 누구도 모른다. 신학자가 성서학자가 진실로 종교적인지 누구도 모른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진실되게 종교적인 사람인 경우도 많다. 특히 종교 분야에서 사람의 겉과 속은 정말 다를 수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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